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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Jun 24. 2016

자신감을 높여주는 빨간포션 ‘알리오올리오’

볼품없는 요리도 소중한 특기가 되는 날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이력서 특기란에 아무것도 적지 못해 망설이게 되는 날. 평소에는 시답지 않은 취미도 특기인 것처럼 적어내다가도 그날 하루만큼은 특기하나 없는 날. 잘하는 일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능해 보이는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게임에서처럼 HP를 올려주는 빨간포션이 있다면 서너 병쯤 마시고 싶은 날이랄까. 빨간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호랑이 기운이 불끈 솟아올랐으면 싶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불안한 날에는 따스한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었다면(‘초라한 날의 위로’ 참고), 자신감이 바닥을 칠 듯 말 듯 한 날에는 ‘뭐 하나라도 잘하는 게 있다’ 거나 ‘뭐라도 할 수 있다’는, 도전과 성공에 기반을 둔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날에는, 실패 확률 제로의 요리가 제격이다. 사소한 도전과 성공이 때로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니까. 한입 먹어보며 ‘오! 맛있다’는 생각이 들고 한 그릇 비우며 ‘이정도면 누구라도 먹여줄 수 있겠는걸?’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만큼은 내가 만든 요리가 나의 소중한 특기가 된다.


그럼 오늘은 뭘 해 먹을까?


더위와 허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니 며칠 전 시골에서 잔뜩 보내준 마늘이 눈에 띈다. ‘냉동해둔 마늘보단 아직 까지도 않은 싱싱한 마늘이 더 풍미가 좋겠지?’ 지난주에 냉동실에 있던 마늘로 만들어먹었던 알리오올리오가 떠올랐다.


‘그래. 오늘의 빨간포션은 알리오올리오, 너로 정했다!’


‘아니, 좀 더 멋있는 이름을 붙여줄까? 목살구이 알리오올리오?'


오일이 잔뜩 들어가서 느끼할 거라는 편견에 평소에 먹어보지도 않았던 알리오올리오다. 언젠가 조리법이 간단하다고 흘려들었던 기억에 찾아보니 재료와 레시피 모두 정말 간단하다. 파스타면, 올리브오일, 마늘, 소금만 있으면 된다. 물론 찾아본 레시피에는 더 많은 재료가 들어갔지만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재료만 눈에 들어오는 법.


처음 만들었던 날의 재료. 냉동실에 있던 표고버섯도 함께 넣었는데 어울리지 않아서 두 번째 만들 때에는 뺐다.


이름도 특이한 알리오올리오. 먹고 나면 배가 고플 것만 같은 밍밍한 비주얼에 속아 냉장고 깊숙이 잠들어 있던 목살을 구워 곁들였다. 입맛은 없는데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아서 딱 일주일 전에 처음으로 만들어보고 오늘이 두 번째다. 마법의 가루 허브솔트를 잔뜩 뿌렸더니 생각보다 맛이 좋다. 올리브오일과 마늘, 그리고 허브솔트가 어우러져 나는 풍미에 금방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이정도면 누구라도 먹여줄 수 있겠는걸?’



다 먹고 나서야 포크가 아닌 젓가락으로 먹었다는 걸 알았다. 포크로 돌돌 말아 접시에 담았으면 더 예뻤으려나 하는 생각도 잠시. 왠지 집에서 먹는 알리오올리오는 젓가락으로 호로록 먹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노란 그릇에 파스타면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오늘은 하얀 그릇에 담아봤다. 다진마늘이 뭉치지 않게 고루 펴고 허브솔트를 듬뿍 뿌렸더니 이전보다 더 맛깔나보인다.


몇 번 써먹은 빨간포션에는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다음에는 내 사람들이 좋아하는 크림파스타를 만들어볼까. 아니면 진득한 크림리조또를 만들어볼까. 귀차니즘보다 설렘이 큰 걸 보면, 오늘 들이켰던 빨간포션이 확실히 효과가 좋은가 보다.


볼품없고 낯선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결과물일지라도, ‘나 이거 할 수 있어. 잘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한 날에는 그야말로 알리오올리오가 제격이다. 백예린의 'bye bye my blue'를 들으며 요리를 해서 그런지, 오늘의 blue와 벌써 안녕한 것 같다.



2016.06.23



혹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면 나만의 빨간포션을 요리해보는 건 어떨까?


이렇게 만들었어요


준비물(1인분) : 프라이팬 2, 냄비 1, 파스타면 100원짜리 동전만큼, 목살 한 덩어리, 올리브오일, 통마늘 5개(4개 다지고 1개 편 썰기), 허브솔트, 소금

냄비에 물을 끓여 파스타면을 넣고 5-6분 더 끓인다. 이때 소금도 한소끔 넣어준다.

면이 익으면 물컵으로 면수를 한컵 덜어내고 남은 면수를 버린다.

면을 삶는 동안 후라이팬1에 목살을 굽는다. 허브솔트를 충분히 뿌려가며 굽고 핏물이 살짝 남아있을 때 한입 크기로 잘라 약한 불에 더 익혀준다.

면을 삶고 목살을 충분히 익힌 뒤에, 후라이팬2에 올리브오일을 듬뿍 뿌려 다진마늘과 편 썬 마늘을 볶아준다.

마늘향이 나고 마늘이 살짝 눌러 붙을 쯤에 면을 넣고 볶아주다가 면에 올리브오일이 고루 묻으면 허브솔트를 듬뿍 뿌려준다.

이어서 면수를 반컵 넣고, 면수가 줄고 면에 다진마늘이 알맞게 묻어나면 목살을 넣어 면과 함께 볶다가 면수를 더 넣고 30초~1분 더 졸여준다.

완성된 알리오올리오를 접시에 담아내면 끝!


* 면을 익힐 때는 올리브오일에 볶아주는 걸 생각해서 1분 정도 덜 익히면 좋다. 또, 완성된 알리오올리오 위에 목살을 올려내도 되지만 1차로 면수를 붓고 목살을 넣은 뒤 다시 면수를 추가로 부어 졸여주면 목살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올리브오일과 마늘 향이 목살에 고루 배긴다. 두 번째 만들 때 이렇게 했더니 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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