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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Aug 11. 2016

더운 바람이라도 좋다

당신과 함께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 매미가 울지 않았던 여름의 길목에서 만나 서늘한 밤을 골목골목 함께 걸었다.


“요즘은 잘 지내니?”


매번 만날 때마다 듣는 말이지만 언제나 반가운 물음이다. 내겐 몇 달에 한 번씩은 꼭 들었으면 하는 인사말 같다. 물음에 대한 답으로 요즘 경험했던 여러 상황과 느꼈던 감정들을 거르는 것 없이 말한다. 퇴사 이후의 시간들과 이직에 관한 이야기부터 연애, 책, 어제의 식사 등 가리는 주제 없이 잘 지내면 잘 지낸다고 못 지내면 못 지낸다고 ‘괜찮은 척’, ‘쿨한 척’ 하나 없는 100%를. 딱 그만큼, 그 전부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 물음은 언제나 반갑다.     



요즘은 잘 지내니?


그리고 한 달 반 만에 반가운 그 인사말을 다시 들었다.      


한 달간의 다리 깁스를 풀고 맞이한 첫 번째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오던 참에 휴대폰이 울렸다. “저번에 말했던 카페 기억하니? 거기 가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면 잠깐 나올래?” 시간제한을 둔 오늘의 'to do list'가 두어 개쯤 있었지만, 긴 머리카락의 물기만 탈탈 털고 바로 나갔다. 먼저 도착해 플랫화이트를 마시고 있던 그녀는 오늘도 기다리던 그 말을 건넸다. 기대했던 커피를 마시며 재잘재잘 떠들다가 우리는 근처에서 점심까지 든든하게 먹었다.


경리단길 어느 골목에 자리잡은 '타이거에스프레소'. 직접 끓인 카라멜시럽을 넣었는지 많이 달지 않고 고소했던 '카라멜드리즐'


다시 집으로 가기엔 어딘가 허전하고 뜨거운 오후 1시. 광화문 서점에 간다는 그녀에게 동행해도 되냐고 묻고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 건너편의 하늘 가까운 곳에는 계단식으로 층층이 자리 잡고 있는 해방촌의 수많은 벽돌 주택과 높다랗게 뻗은 남산타워가 우둑히 서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지 제 눈에는 유럽처럼 보여요!” 유럽은커녕 사실 여권조차 아직 만들지 않은 나였다. 내 머릿속의 유럽은 아마도 선명하고 맑은 하늘에 예스러운 주택으로 가득한 곳인가 보다. 이번에는 바로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사평대로를 따라 쭉 뻗은 가로수들과 이름 그대로 뭉게뭉게 떠있는 구름에 잠시 두 눈이 머물렀다. 나와 같은 곳에 시선을 두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민혜야, 저 나뭇잎들이 다 같은 색으로 보이니?"


"아니요~ 당연히 다 달라 보이죠!"


"너도 그렇니? 그런데 저 잎들이 다 같은 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대"


사람도 사물도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같은 장소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나무일지라도 매일매일의 색이 다르게 보인다. 아마 누구와 함께 보는가, 어떤 기분으로 보는가, 잠시 스치는가 아니면 머무는가에 따라서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경리단길에서 만나 광화문에서 헤어진 그녀는 오늘 참 여러 번 '조심조심'이란 말을 건넸다. 깁스를 풀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은 걷는 모습이 불안정한 내가 걱정되었는지, 계단을 오를 때나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괜찮니?"라는 세 글자에 "조심조심" 네 글자를 덧붙였다.


'구부러진 길이 좋다 / 들꽃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광화문 교보생명 건물


구부러진 길을 걸을 때 곁에 함께 걷는 사람이 있다면 구부러진 길이 여느 관광지보다 아름다워지곤 한다. 오늘이 그랬다. 내겐 구부러진 길이나 다름없는 경리단길이나 광화문이 여행지처럼 한 컷 한 컷씩 두 눈 깊이 담겼다. 녹사평대로의 가로수들은 '푸른' 두 글자보다 '푸르른'이라는 세 글자가 더 어울릴 만큼, 모든 나무의 모든 잎사귀들이 각기 다른 푸른빛으로 빛났다.


오늘 마신 커피도 그랬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한 달 반을 꾹 참아온 커피였다. 늘 그랬듯, 마주 보고 마 오늘의 커피는 두근두근한 두려움을 상쇄시켜주었다. 커피맛을 알려준 그녀와 함께 마시는 커피는 그 맛이 어떻든 내겐 혀끝에 기록될 만큼 가장 맛있는 커피가 된다.



더운 바람이라도 좋다

바닥만 보고 걷느라 놓쳤던 도로의 가로수가 눈에 들어온 바로 오늘부터, 꽤 오래 참아온 커피를 마신 순간부터, 덥고 갑갑해서 싫었던 여름이 좋아졌다. 나무에 달린 잎사귀들이 각기 다른 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지금 여름과 잎사귀를 살랑이며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좋아졌다.


아마도 오늘의 장면들이 무지개의 일곱 빛깔로는 다 그려낼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면, 그건 아마도 그녀가 함께 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와 당신이 '함께' 만들어낸 시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 답을 정해놓지 않은 사람, 발목에 보호대를 하고 나온 내가 걸을 때마다 “조심조심” 말해주는 사람, 여덟 살이나 어린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도 아껴주는 사람. 내게 보여준 그녀의 당연함이 나는 늘 고맙다.



2016.8.4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도, 잿빛으로 흐린 날에도, 땀범벅이 될 정도로 무더운 날에도,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그날 하루가 무지개의 일곱 빛깔로는 다 그려낼 수 없을만큼 알록달록한 날로 기억된다면, 그건 아마도 곁에 무수한 당신들이 함께 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와 당신이 '함께' 만들어낸 시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더운 오늘, 함께 만들었던 시간들이 내게 남아있기에 더운 바람이 불어와도 나는 오늘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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