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들
퇴사라는 이름의 자발적 실업을 선택하고 5개월째에 접어들 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생각으로 빈둥거리던 몸을 이끌고 현관을 나섰다.
언덕과 내리막길이 반복되는 우리 달동네를 코스로 정하고 3분의 1쯤 걸었을 때였다. 조금 울퉁불퉁할 뿐 별 것 없고 별 볼 일도 없던 내리막길에서 오른쪽 발을 삐끗하며 곧장 앞으로 넘어졌다. 찰나의 삐끗거림은 발등에 얇은 금을 그리고 뼈를 살짝 으스러뜨려 놓았으며 인대도 살짝 늘려놓았다.
어쩌다 깁스까지 하게 됐냐는 물음을 들을 때면 말 그대로 ‘어쩌다’ 넘어졌다는 답변 밖에 할 수 없는, 4주간의 깁스생활이 시작됐다.
동네에 유일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밝았던 하늘이 꽤 어둑해졌다.
‘여름날 해가 지는 속도만큼 내 걸음이 느리구나’
깁스를 하며 지낸 4주 동안 내 삶의 속도는 여름날 해가 지는 속도만큼이나 느렸다. ‘어쩌다’ ‘그냥 좀’ 다친 것뿐인데 5분 거리의 편의점이 20분 거리가 되어버린 불편함은 ‘어쩌다 그냥 좀 다쳤다’는 말에 다 담을 수 없는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살면서 경험했던 ‘기다림’ 중에 가장 긴 기다림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4주라는 기간은 길게 느껴졌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병원에 가 손과 발을 감싼 붕대를 풀고 드레싱과 물리치료를 받았다. 거의 매일 병원에 출근하다시피 했던 이유가 치료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깁스는 얼마나 더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이번 주까지요”라는 답을 하루빨리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던 몇날 며칠 동안, 하루에도 여러 번씩 “아휴, 이 날씨에 너무 덥겠다”, “어쩌다 그렇게 다쳤어?”, “에휴.. 쯔쯧” 등의 말과 함께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동정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발끝에서 시작해 머리끝으로 올라와 다시 발끝으로 내려가는 시선들은 낯설고 따가웠으며 (드물었지만) 때로는 따뜻하기도 했다. 그래서 집을 나설 때면 복잡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그런 한마디를 격 없이 던질 만큼의 관심이 우리사회에 아직 남아있구나’라는 안도의 감정과 ‘걸음걸이가 조금 엉성해지고 걷는 속도가 느려진 것뿐인데 왜들 그렇게 다시 고개를 돌려가면서까지 쳐다보지?’라는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 사고를 확장해서, ‘누군가 길에서 다치거나 험한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을 스쳐 지나지 않을 사람들이 아직 있구나’라는 건강한 관심에 대한 기대와 ‘길거리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선이 한여름에 깁스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비교도 안 되겠구나’라는 건강하지 않은 관심에 대한 우려가 교차했다.
그렇게 4주 동안, 깁스를 했던 내 다리는 건강한 관심과 불편한 관심의 교차점이 되었다. 내가 그들의 시선을 불편해했던 건지, 나로 인해 그들이 불편한 감정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해온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들과 마주하기도 했다. 하루는 정류장에서 교복 입은 학생이 내 다리를 여러 번 힐끔거렸다. 같은 버스를 기다렸던 그 학생은 나를 앞질러 버스에 올랐고 한자리 남아있던 노란색 ‘교통약자석’에 털썩 앉았다. 내가 교통카드를 찍자 버스는 바로 출발했고 달리는 버스에 한발 한발을 조심스레 내딛으며 내리는 문 뒷쪽의 의자까지 걸어갔다.
당황스러웠다. 그간 나에게 교통약자석은 ‘당연히’ 비워두는 곳이었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자리가 없더라도 앉지 않는 곳이었다. 양보를 강요받아 비워야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당연히 비워두는 자리였다. 하지만 나에게 비워두기가 당연한 만큼 비워두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바란 것은 ‘양보’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지만 누가 봐도 교통약자인 나를 배려해주길 바랐다.
또, 모든 기사님들이 그러시지는 않았지만 4주간 내가 탔던 버스의 절반 이상은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거나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서있기도 전에 출발해버렸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버스 곳곳에는 ‘정차 후 자리에서 일어나세요’와 같은 문구가 붙어있었다.
물론 정반대의 경험도 있었다. 만원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해주려 했던 학생들과 곧 내릴 거라는 말에도 앉으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신 아주머니를 만나는 등 민망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던 뭉클한 순간들도 여럿 있었다.
'장애'는 사전에서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로 정의된다.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장애는 '가졌던'이라는 과거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잠시 스쳐가는 불편함이었다. 오른쪽 손에는 붕대를 감고 오른쪽 발에는 깁스를 해서 왼손과 왼발을 더 분주하게 움직이는 정도. 딱 그만큼만 삶의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내가 살아왔던 기존의 속도, '보통'의 속도보다 삶이 조금 느려졌을 뿐 나는 여전한 나로서 존재했다. 다만, 그 4주 동안 마주했던 사회적 장애물들이 크고 작은 불편함과 불쾌감으로 다가와 온전한 내 하루를 방해했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5%인 250만 명의 사람들이 장애를 경험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온전한 하루를 살아간다. 그 하룻동안 이들이 부딪히는 사회적 장애물과 그로 인해 느끼는 불편함과 불쾌감은 나의 짧은 경험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기에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누구보다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도, 삶이 조금 느려지고 나의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직접 느껴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보낸 시선과 나의 사고, 나의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사회적 장애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사회 곳곳에서는 장애인이 겪는 일상의 불편함을 줄이고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일부 시선과 편견을 바꾸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경사로, 장애인 주차구역, 장애인 화장실 등의 설치로 삶의 공간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과 캠페인이나 교육을 통해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그러하다.
4주간의 깁스를 푼 직후,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노력을 업으로 삼는 곳으로 이직했고(2016년 8월), 어느새 일년이 흘렀다. 깁스를 풀기 전에 써두었던 이 글을 일년이 지난 지금에야(2017년 10월) 마무리를 하는 것은 아마 (나의 게으름과) 위에서 말한 '캠페인'을 직접 준비하면서 내가 느낀 것들에 대한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당연함'이 다수에게도 당연한 것이 되고, '장애'가 건강한 관심과 불편한 관심의 교차점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확신에 찬 욕심이 얼마나 오래 내 안에 함께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위에서 말한 일년이 2017년 가을이다. 깁스를 풀고 계절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이제 일곱 번째 계절, 봄이 오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올려야겠다는 '생각만' 품고 여섯 번의 계절을 보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교정을 보고 편집하는 일을 하다보니 종종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였던 짧은 문장도 써내려가기가 겁날 때가 있다. 그래도 봄이니까, 다시 봄이니까 노트북을 들고 좀 나가보아야겠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잘'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