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물음을 피해 제주로 도망쳤던 그 밤의 이야기
가끔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묻어둬서 고마운 사람들이 있고, 가끔은 아무 말이라도 물어줘서 고마운 상황들이 있다. 퇴사 후, 물음을 피해 도망쳤던 제주에서 그런 사람과 그런 밤을 만났다.
2월 29일 자로 퇴사를 하고, 3월 1일에 제주로 떠났다. 혼자서 네 번째 제주로 떠나던 터라 면허도 없는 뚜벅이 주제에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일정도 짜지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오자는 생각으로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비행기에 올랐다(1시간 남짓한 비행이지만 촌스럽게도 나는 여전히 비행이 무섭다).
서울에서 나는 ‘물음’에 질려있었다
왜 퇴사하냐는 물음과 퇴사하고 무얼 할 거냐는 물음, 그럼 무얼 하면서 쉴 거냐는 꼬리의 꼬리를 무는 물음에 누군가 내게 보이는 작은 물음표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도망치다시피 서울을 떠났다. 가족 친구 연인 그 누구의 물음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한 번뿐인 물음이 나에겐 여러 번 반복됐으니까. 고마웠던 걱정이 나에 대한 불신과 잔소리처럼 느껴졌으니까.
제주에는 내게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 제주에서 처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언니는 내가 학생인지 직장인인지, 직장인이라면 휴가를 내고 여행을 온 건지, 무슨 일을 하는지, 왜 혼자 왔는지 등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주인으로서 게스트에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아니었다. ‘구태여’ 묻지 않고 묻어두는 듯했다. 3월의 첫날, 혼자서 제주까지 날아온 나름의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더는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고 묻어두는 것처럼.
하지만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에 있어 물음이 오고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주인언니도 얼마지 않아 내게 물음을 던졌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검색도 잘 안 될 텐데”
2년 사이 네 번이나 방문한 제주였기에 교통편이 좋으면서 한적한 마을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일이 내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이용수칙을 전해 들은 뒤 침대에 짐을 풀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한적한 마을 풍경을 감상하며 찬바람에 언 몸을 녹이니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낮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근처 관광지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30분을 걸었나 1시간쯤 걸었나. 그사이 다시 얼어붙은 손을 녹이려 근처 카페로 가 따뜻한 한라봉차를 한잔 마셨다.
돌아가는 길, 주인언니가 추천해준 동네 고기국수집에서 돔베고기가 푸짐히 올라간 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게스트하우스가 있던 마을로 걸어갔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며 걸어가다가 불빛 하나 없이 어둠이 내린 제주의 골목길에서 나는 길을 헤맸다. 휴대폰 불빛 말고 빛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밤 골목에서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 우리가 비추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
서울의 밤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던 길 잃은 제주의 밤. 캄캄한 골목에 주저앉아 막막함에 고개를 들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듯 별빛이 내리던 밤하늘은 “괜찮아. 우리가 비추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을 걸듯 나를 다독였다. 제주의 밤하늘이 나에게,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나에게 용기를 주던 밤. 그 밤의 찰나가 어둠 속에서 다시 길을 찾을 용기를 주었고 다음날 더 힘껏 걸어 다닐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무사히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던 그 밤, 주인 언니는 직접 담근 청으로 만든 따뜻한 한라봉차를 내주었다. 밝은 오후에 카페에서 마셨던 한라봉차는 혀를 데일 정도로 뜨거웠지만 주인 언니가 건네준 차는 마음을 녹일 만큼 따뜻했다. 한라봉차를 쭈욱- 들이키고 바닥에 남은 오동통한 한라봉까지 삼키고 나서야 어둠 속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여도 사라지지 않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침대 위 뜨끈하게 데운 전기장판에 다리를 뻗었다. 한없이 뒤척이며 잠을 설쳤던 지난 나날들을 까먹어버릴 만큼 오랜만에 깊고 깊은 꿀잠을 잤다.
다음날, 근사한 한정식 한상을 조식으로 먹고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겼다. 전날보다 한층 따뜻해진 바람과 햇살에 오늘의 목적지는 섬 ‘우도’로 정했다. 우도로 가는 배 안에서 주인언니에게 문자를 보내 하루 더 묵을 수 있는지 물었다. 비수기였던 터라 방은 넉넉했고 그렇게 나는 어제와 같은 방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낮시간의 대부분을 우도에서 보내고 나와 성산일출봉을 둘러보고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제의 막막함이 떠올라서 어제보단 이른 시각에 게스트하우스로 발을 돌렸다. 도착해서 한쪽 벽에 적혀 있는 계좌에 오늘 묵을 숙박료를 입금했고, 그러자 곧 주인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
저녁 드셨어요?
단 여섯 글자에 울컥해버렸다. 주인언니는 어느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던 말을 했다. 3월의 두 번째 날이자 홀로 제주에 온지 두 번째 되던 날, 나는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여섯 글자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을 때 조용히 내밀어 주는 손길 같았다. 찬 바닥에 양손과 무릎을 긁혀도 ‘괜찮아 괜찮아’ 혼자서 토닥이며 눈물을 꾹 참던 순간에 건네진 따뜻한 손길. 그간 묵혀왔던 감정에 북받쳐 울고 연고를 건네받은 것 같은 뭉클함에 또 울었다.
인사치레로 사용하는 ‘밥 먹었어?’라는 말. 그 밤 내가 들었던 저녁 먹었냐는 물음도 저녁시간이 조금 지나 돌아온 게스트에게 주인이 물을 수 있는 인사치레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물음이 내게 전해졌던 찰나는 그런 당연한 물음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물음. 서울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제주에서의 물음이 수많은 물음에 지쳐있던 나를 위로했다.
눈물을 뚝 그치고, 게스트하우스의 1층 다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근처 마트에서 사 온 맥주를 마셨고 문자를 받고 내려온 주인언니는 커피를 볶았다. 이어서 들어온 다른 게스트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동갑내기 게스트에게 남은 맥주 한 캔을 건넸다. 주인언니는 다방에 모여 앉은 우리에게 갓 볶은 콩으로 내린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좋았다. 다방을 감싸는 커피 향이 좋았다. 난로에 땔감을 넣어 다방을 데워주는 주인언니도 좋았다. 같은 공간에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도 좋았다. 단 여섯 글자가 만들어준 따스한 밤이 내겐 너무나 고마운 밤으로 다가왔다.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봐도 불안한 말투로 앞으로 뭐가 하고 싶냐고 물어도, 그래도 나는 괜찮다. 이제는 괜찮다. 길을 잃고 주저앉았던 낯선 골목에서 고개를 들어 별을 보았고, 다시 한번 길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법을 배웠다. 수많은 별들과 마주했던 그 찰나의 기억이 두 달이 지난 오늘에야 더욱 선명해졌다. 벽난로 불빛이 일렁이는 다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조그만 노트에 어제의 별빛과 주인언니의 물음을 끄적였던 그 밤의 공기가 여전히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
얼마 전 카톡으로 받았던 건강하게 지내냐는 물음에, 이 글이 조금 긴 답장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