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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May 13. 2016

어쩌면 특별한 일상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



빳빳하게 마른 수건을 잔뜩 개고, 엄마의 연두색 손수건과 오빠의 카키색 손수건도 하나씩 접었다. 양말은 동그랗게 말아 접고 하얀 나시는 반듯한 직사각형으로 접어 바구니에 넣었다. 가슴 아래까지 긴 머리카락을 바짝 말리고 지난 비바람을 핑계로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러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동네 주민센터로 걸어갔다. 한 달 전에 사뒀던 도톰한 하얀 가디건을 첫 개시한 오늘, 강하지만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좋다. 이병률 작가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가 생각나는 기분 좋은 바람이다.


주민센터를 나와 이번에는 경복궁역으로 걸음을 옮긴다. 대림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광화문으로 걸어나와 서점에 갈 생각이다. 지극히 평범한, 5월의 날 좋은 수요일일 뿐인데 미술관 주변이 조금 북적인다. 평일 이 오후에 나 말고 또 누가(종종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잉여롭다고 착각하곤 한다) 전시를 보러 왔을까 싶어 두리번거리니 교복 입은 여고생들이 곳곳에 보인다. 중간중간 커플도 있고 친구와 함께 온 사람도 있고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여럿 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하기를 바랐던 기대가 사라지고, 찰칵찰칵 소리를 피해 다음 작품으로 빠르게 이동해본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휴대폰이 어느새 오른손에 들려있고 내 휴대폰도 덩달아 찰칵찰칵.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하기를 바랐던 기대가 뭉그러진다. 나도 누군가의 기대를 뭉그러뜨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미술관 뒤에 마련된 작은 카페에서 미술관 멤버십 혜택으로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시며 더위를 식혀본다. 오늘 첫 개시한 가디건을 벌써 벗어버릴 수는 없다. 기울어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5월의 쨍쨍한 해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오늘이 너희에겐 참 특별한 날이구나


미술관과 카페에서 발을 돌린다. 이제 광화문으로 가자. 경복궁 앞을 지나는데 관광버스가 길게 늘어서있다. 가장 앞쪽에 주차된 버스 측면에 ‘구미’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다. 뒤에 이어진 모든 버스 앞유리에는 ‘ㅇㅇ중학교 수학여행’이라고 쓰인 종이가 세워져 있다. 그 옆 길가에는 무채색 옷을 입은 남학생들이 잔뜩 서있다. ‘수학여행’이라니. 'MT'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20대의 눈에는 그 네 글자가 귀여워 보였다. 이 아이들에게 오늘은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특별한 날이구나. 일 년에 단 2박 3일뿐인 날.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열여섯 해에 떠나는 수학여행. ‘오늘이 너희에겐 참 특별한 날이구나.’ 뜨거운 봄볕 아래에 서있던 아이들은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아이들을 눈에 담고 스치는 내 입꼬리는 괜히 씰룩거린다.


어쩌면 오늘은, 미술관에서 스쳤던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날일지 모른다. 중간고사부터 과제까지 모두 끝내고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와 손을 잡고 데이트를 나온 사랑스러운 날. 오랜 친구와 가벼운 수다를 떨며 봄을 즐기는 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


맞다. 어쩌면 오늘은, 내가 스쳤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일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손꼽아 기다려온 날. 그런 날이 바로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늘일지도 모른다.


잠깐, 그럼 나는?
나한테 오늘은 어떤 날이지?


오늘은 내게 ‘그저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전시티켓이 있어서 날 좋은 5월에는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마침 엄마 생신선물로 드릴 책과 현금을 넣어드릴 예쁜 봉투를 사야 해서 겸사겸사 게으른 몸뚱이를 끌고 나온 그런 날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자 지극히 평범한 날.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오늘은 특별했다. 오늘은 분명 어제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뻔한 루트에서 뻔하지 않은 장면들을 두 눈에 담았고 다시금 뻔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일렁였다.


나의 오늘은, 누군가 간절히 바랐던 내일이라서 특별한 게 아니다. 내 인생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는 단 하나뿐인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거다. 쳇바퀴 돌 듯 매일이 반복되고, 무료한 일상에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아도, 그럼에도 내가 보낸 어제와 내가 보내고 있는 지금의 간격에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다.


엊그제는 과일트럭을 다시 만나지 못해 아쉬워했던 그 마음이 특별했고 엄마와 깔깔거리며 걸었던 집 앞 철도건널목이 특별했다. 내 하루에서 특별함을 찾는 것은 온전한 나의 몫이다. 어제와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오늘은, 어쩌면 매일매일이 특별한 일상 중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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