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하수희 Dec 22. 2024

21 내가 누구게?

가지마!

지훈은 정확하게 이 길이라며 밀려 들어오는 불안감에 자신도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수련에게 전화가 온다. 다짜고짜 자기 할말만 퍼붓는 은교였다.


-너 이 가시나 오늘 무슨 날인지 또 까뭇제? 그 오빠들 바쁜 사람들이야. 낼모레 귀국한다카데. 그래가, 시간이 읍써. 니 오늘은 쪼매 꾸미고 나온나, 알았제? 오늘이 디데이야!

디!디비지고,

데!데불고살면,

이!이번생은 성공!

디.데.이! 알았제? 6시까지 조신하고 섹시하게 하고 나온나!.-


“야! 조신하고 섹시한건 어떻게 입어야 하냐?.”


-뚜뚜뚜-


“에라…EC.”


수련은 이미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향해 귀여운 욕설을 뱉었고. 지훈은 수련의 통화에 궁금증을 갖고 물었다.


“응? 조신? 섹시? 무슨 말이야?.”


“아, 별일은 아니고. 나 오늘 약속 있었다.”


별일이 아닌 수련과 달리 지훈의 표정은 난데없는 폭우를 맞은 듯 심각해졌다.


“나 오늘도 너랑 자려고 했는데? 오늘은 안돼 나가지 마.”


그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진지한 말투는 수련의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젯밤의 서운함이 남아 있었고, 화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에 불이 붙어 더욱 단단히 방어태세를 취하게 만들었다.


“야! 땡땡이 너 집 팔아서 차 샀지? 너 집 없지? 이게 어디서 나한테 빌붙어 살려고, 돕느니마느니 약을 팔어? 더 이상 안 속아!돌아가!.”


평소 같았으면 수련의 말에 웃어라도 줬을 지훈이지만 더없이 확고해진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오늘밤 너랑 여기 있을 거야. 오늘 나가지 마라 응?.”


‘밀당이 필요해! 흥! 너 말고 내가 남자 없을 줄 알아?. 이게 내가 맨날 집에 들여줬더니 날 너무 쉽게 보나?.’


그렇게 생각한 수련은 마치 단전 아래로 기를 모으듯 깊은 심호흡을 하더니 썩 쿨 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나 남자랑 약속 있어. 그것도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랄까?.”


눈을 내리깔고 도도 하게 말을 뱉었지만 곧장 지훈의 무너질듯한 얼굴을 보자 막상 당황하고 버벅대기 시작한 것은 수련이었다.


“결혼?? 네가 다른 남자랑 결혼?”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무겁게 가라앉았다. 결혼이라는  단어 하나가 심장을 짓누르듯 내려앉고 머릿속은 한순간 공허해졌다.


말을 꺼내 놓고 수습을 못하며 당황하는 수련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지훈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고정된 채 결혼 이라는 단어만 되새기고 있었다.


“뭐,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나도 나이가 있잖아. 저번에 만나봤는데 꽤 괜찮더라고 사람이...”


‘아이 씨 김수련 왜 계속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거야? 어쩔수가 없다. 한번 출발한 기차는 빽이 안되지. 못 먹어도 고!.’


여전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소처럼 꿈뻑꿈뻑 수련을 바라보며 대답을 철회해 주기를 바라는 지훈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면서도 수련은 냉철하게 쐐기를 박았다.


“나 오늘 그 남자랑 자고 들어 올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까 나 기다리지 말라고!.”


‘오마이!! 김수련 너무 갔다!! 초고속 열차야 뭐야?.’


지훈의 얼굴에 일순 핏기가 사라졌다. 방황하는 기다란 손가락이 잘생긴 얼굴 언저리를 정신없이 훑고, 쓸었다.

마음이 괴로운 만큼 자신의 얼굴을 괴롭히다 절규하듯 부탁했다.


“잠시만 수련아! 너 그 사람 사랑해?. 아니다! 그 얘긴 나중에, 사랑해도 안돼. 오늘은 안돼.오늘 가지마!.”


간절한 지훈의 표정에 수련도 마음이 흔들렸으나 오늘‘만’ 가지 말라는 마지막 말에 또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뭐? 오늘만 가지마? 노래하고 자빠졌네. 오늘은 안 되고? 내일부터는 이놈 저놈 막 자고 다녀도 된다는 거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재수 없어!

나가 너! 처음부터 이상했어. 연인이니 내 여자니, 개소리 씨 뿌릴 때부터 알아봤다고!. ”


이미 브레이크가 없었던 수련에게 화는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도깨비처럼 시뻘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지훈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지훈은 그런 수련을 어르고 달래려 노력중이다.


“오늘은 단순한 월식(그달의 초하룻날)이 아니야. 정확히 오늘 오후 9시 47분쯤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해 달빛이 전혀 보이지 않을거야.”


마음과는 다르게 나오는 표정과 말투에 못된 말을 덧붙여 쇠 된 소리로 쏘아붙이는 수련.


“그게 내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랑 뭔 상관인데?.”


지훈은 이제 어질어질 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를 손으로 짚으면서도 또박또박해야 할 말을 전한다.


“달빛이 사라진 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야. 이런 밤엔 어두운 것들이 빛을 향해 몰려들어. 그런 것들에게 너는 너무 눈부신 존재야.”


“나 귀신 같은 거 안 믿는다고 했지! 게다가 네가 준 부적도 있고 반지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수련의 옷자락을 쥐고 지훈은 이제 필사적으로 매달리듯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귀신, 잡귀 따위야 걱정 안 해 나도. 문제는 인간이야. 네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게. 시험에서 1등을 하고 싶은 욕심 많은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 봐. 하필 그 시험을 감독하는 선생이 교실 밖으로 나가는 거야. 잠깐, 그 순간인 거야. 대부분 인간은 그 잠깐을 기다리지만 악에 가까운 인간들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래서 악귀가 되는 거야. 오늘 같은 날은 악귀의 가까운 인간들이 그 눈을 뜨는 날이라고 제발 부탁할게. 나가지마 오늘은.”


‘1년 전 놀이터에서도 오늘 같은 월식에 달이 숨었던 그런 날이었지…. 널 또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수련의 생각은 마음과 엉켜 길고도 복잡했다. 그러나 세 번의 동침에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던 지훈의 괘씸(?)한 행동을 떠올리자, 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아니, 나 갈거야.”


흥얼거리며 옷방으로 들어서는 수련은 지훈 앞에서 보란 듯이 오늘 입을 옷을 고른다.


지훈의 얼굴은 길가에 버려진 낙엽처럼 축 처져 있다. 그리고 그 반짝이던 눈망울엔 말라가는 나뭇잎처럼 버석한 근심이 가득했다.


이날 저녁 -


‘춥다.. 너무 추워.’


수련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이곳은..강남의 고급 호텔방.

종이처럼 부스럭 거리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어라? 손가락이 텅 비어있다.

수련의 전신이 마치 깡통 로봇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뚝뚝..

긴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은 방금 샤워하고 나왔다.


그 남자의 샤워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의 소리가 마치 경고음처럼 울렸다. 수련의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섰고, 상황이 더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걸 직감했다.


깡통 로봇처럼 딱딱하고 덜거덕거리는 수련의 정신 상태도 그처럼 말랑하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해 내야 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은교랑 은정 언니와 신나게 마시던 그 순간까지는 괜찮았어. 그런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욕조.

욕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그 작은 공간이 갑자기 너무 비좁고 초라하게 느껴졌어. 그래도 나는 마치 콩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들어갔지.


물은 너무 차가웠고, 뜨거운 물을 틀자, 몸이 델 만큼 뜨거워졌어.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을 번갈아 끼얹다가 그저 적당히 물기를 닦고 나와버렸어.


젖은 머리를 쥔 채 알몸으로 덜덜 떨며 뻑뻑한 침대보를 들추고 기어들어 갔지. 도대체 나는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낯선 호텔 방 안에서, 이불 속에 파묻힌 채 자괴감에 잠시 빠져있다가 머리를 꺼내봤어.


이건 무슨 소리지?

귓가에 얇고 날카로운 소리가 챙챙 울려 퍼졌어. 이국적인 음색이었지만 단조롭고 길게 떨리는 소리.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 눈을 들어보니, 바닥의 카펫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화려한 색으로 번지기 시작했어. 넓게, 더 넓게 퍼져가며 공간을 집어삼키듯 바뀌었지.


놀라서 옆을 봤어. 테이블과 전화기, 책상과 펜까지… 모든 가구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디자인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어. 공간은 거대하게 팽창하고, 내가 아는 호텔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지.


이불을 쥐려 했는데, 손에 닿은 건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딱딱한 무언가였어.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말 그대로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어.


환각, 환시, 환청.

나는 미친년이지만 바보는 아니야.

이건… 마약이야.!’


남자는 건장한 몸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타월로 하반신만 가린 채 수련 앞에 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시뻘건 전기톱이 들려있었으며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몇 조각으로 잘라 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