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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수희 Dec 15. 2024

20 내가 누구게?

날 미치게 해줘!

서로를 뜨겁게 마주 보며 숨소리마저 집어삼킨 서로의 얼굴 사이로 시간이 한참 맴돌았다.

수련의 허리를 두 팔로 꼭 감아쥐고 그녀의 전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했으나 그 안엔 그녀를 향한 흔들림 없는 의지가 반짝였다.


지훈의 품 안에 들어온 수련은 난데없이 커다란 새장에 갇힌 가냘픈 종달새처럼 한없이 여리게 느껴졌다.


그 품을 벗어나려는 작은 반항도 종달새에 날갯짓처럼 보잘것없었으며 그저 귀여웠다.


지훈은 그런 사랑스러운 그녀를 꼭 안고 놓지 않았다.


지훈의 눈빛은 깊은 숲속에 스며든 새벽안개처럼 몽환적이면서도 투명했다. 그 시선에 붙잡힌 수련은 그에게 끌리듯 다가서며 숨결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퍽!-

“아얏!”


수련이 순식간에 또다시 머리통을 치켜들어 지훈의 턱주가리를 날려 버렸다.


“수려나,,나 혀깨무러써..”


“이 도깨비 같은 놈! 그러니까 누가 인간을 홀리래? 너 인간 세상에 왜 내려왔어? 너 이 자식 여자 혼 쏙 빼먹고 너 혼자 천년만년 사는 요괴 같은 거 아니야? 그러지 않고서야 나 김수련이 수컷 따위한테 두근댈 리가 없잖아!.”


수련이 지훈의 품에 빠져나와 허리에 손을 짚고 씩씩대지만, 지훈은 혀를 깨물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러니까 너 나한테 반했다는 얘기지? 두근댈 정도로? 그럼 됐어. 이까짓 혀쯤이야 반이 아니라 다 썰어줘도 아깝지 않지.”


수련이 이제는 반응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훠이훠이 지훈을 날려 보냈다.


그렇게 또 같은 침대 또 같은 밤을 보낸 수련과 지훈.


다음 날 아침-


수련은 제대로 심통이 나 있다. 찬바람이 쌩쌩인데 지훈은 이유를 모른다.


“야 땡땡이! 네가 나를 돕겠다고 했으니까, 너에게 공유하는 정보야.”


묵직하고 너덜너덜한 노트. 흐트러짐 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지훈에게 던지듯 건넨다.


“...”


“다 볼 필요는 없고 뒤에 내가 쓴 글씨만 보면 돼.”


지훈이 피곤하다는 듯 엄지와 검지로 감은 두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너한테 다 들은 얘기 같은데.”


“너! 협조하고 도울 생각이 있긴 있는 거야?.”


수련은 지금 단지 심통이 나서 시비를 걸고 싶은 거다.


“알았어, 볼 게 다시 볼게,”


지훈이 간밤에 들은 얘기를 노트에서 다시 정리해서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는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계속 같은 꿈을 꿔서 어느 정도 꿈에 대한 근거도 확보했고 이제는 아버지가 잡지 못한 범인을 네가 잡든,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잡든, 어쨌든 경찰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는 네가 이 위험한 짓을 하겠다는 거잖아 지금!.”


말을 정리하던 지훈은 수련의 아버지가 떠오르자 또 울화가 치밀어 언성이 높아졌다.


“응 나 아니면 누가 해? 나밖에 없어. 아빠는 죽어서도 나를 원해, 내가 필요해.”


지훈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주저앉힌 채 고개만 번쩍 치켜들었다.


“어떻게 너는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아버지가 시키면 지옥문이라도 열고 들어갈 셈이야?

죽어서도 자기 뜻을 이루려고 딸을 사지로 몰아넣는 아버지가 어딨냔 말이야!.”


지훈은 탁자 위에 놓인, 오래된 약통을 움켜쥐고 부술 듯이 세게 탁자 위에 박아버렸다.


간밤에 지훈은 들었다. 그동안 수련이 비밀의 방에서 아빠와 해결해 온 미제사건들에 대해서.


**


9살이 되던 해 2달가량 의식이 없었던 수련이 회복되고 겨우 부모는 안심했지만. 그 당시 수련은 잠드는 것을 힘들어했다.


악몽을 자주 꾼다고 잠들기 싫다며 칭얼댔었다.


아무리 그 당시 기억을 잃었다 해도 당연히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부모는 이해했다.


그러다 어느날 문일은 아내가 가끔 먹던 수면제 반 알을 딸에게 먹여보았다.


아내는 한 알을 먹고도 잠을 잘 못 이루는 편이기에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딸이 사라졌다.


딸이 사라진 것을 안 것은 아침에서였다. 둘 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 모르고 있던 그때 수련은 엉망이 된 잠옷 차림이지만 멀쩡히 집으로 걸어들어왔다.


수련은 돌아오자마자 스케치북에 이것저것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슈퍼앞 사거리, 초록색 츄리닝, 운동화, 춥다, 시멘트 냄새,>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문일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나비가 달린 여아의 작은 머리핀.


스케치북에 써 내려간 글씨들을 보고 궁금증만 키워가던 문일은 수련이 건네준 머리핀을 본 순간 모든 것이 퍼즐처럼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실종된 소녀의 마지막 모습, 양쪽에 꽂아둔 머리핀, 그 사진 속에 머리핀과 똑같았다.


그리고 실종된 소녀가 사라진 곳에 슈퍼 앞 사거리에는 고장난 CCTV가 있어 수사의 난항을 겪고 있었다.


다행히도 문일의 팀에서 맡고 있던 사건이라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먼저 시신을 찾는 것이 첫 번째!


딸의 메모가 모두 사실이라면 시멘트로 매장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근처를 탐문하던 문일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배수로였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본 곳에 소녀의 시체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 한 켤레 가 있었다.


마치 이것으로 범인을 잡아달라는 듯 소녀의 시체가 운동화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문일은 처음으로 수련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게 되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사건이 생길 때마다 수련에게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수련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수면제에 의해 정신이 지배되어 눈을 감게 될 때 가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 어느 곳으로 향했다.


분명 목적이 정해져 있는 걸음처럼 정확했고 아무리 멀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을 찾아갔다.


문일은 그런 수련을 지켜보다 따라다니며 증거를 수집하고 사건을 해결 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수련이 잡는 놈들은 대부분 소아성애자나 그들을 도운 그들보다 더 나쁜 놈 중 하나였던 것.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붉은 실은 자기 딸을 그렇게 만든 놈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경감이 되고 많은 증거들에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오자 자연스레 놈에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문일.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딸에게 이것만큼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혼자 범인을 잡으러 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밤. 그놈의 아지트로….


**

다시 현재 수련과 지훈.


“어린 딸한테 수면제까지 먹이면서 범인을 잡고 싶었을까? 그러다 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어떻게 알고?.”


약통을 쥐고 부들거리는 지훈을 수련은 낮은 한숨 뒤에 서글픈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그래도 내 아버지야, 나쁜 놈 잡아들이는데 나한테 약 좀 먹인 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빠도 그게 최선이었다면.”


지훈은 더없이 확고한 수련의 태도에 더이상 설득할수 없으리라는걸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금발 머리 남자한테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너희 아버지가 남겨둔 자료를 봐도 금발 머리 남자에 관한 건 없었는데. 이현우 형사라는 사람도 거기에 관해선 전혀 모른다며?”


수련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빛났고 생기가 돌았다.


“응, 중요한 건 아빠 꿈에서 도망치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빗물에 얼굴이 씻겨나가면서 수술 자국? 바늘자국? 붉은 반점 같은 게 흉측하게 드러나는 거야. 그 얼굴을 미친 듯이 긁어. 근데 그 꿈은 초콜릿을 받아 든 여자애 꿈에 나오는 남자도 같아. 금발 머리, 미친 듯이 얼굴을 긁다 내꿈 에선 그 얼굴이 괴물처럼 변하지만, 난 같은 남자라고 생각해.”


지훈이 여전히 구겨진 플라스틱 약통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쓴 채 묻는다.


“이제 더 이상 너희 아버지는 꿈에 안 나오시는 거지?.”


“응, 한 일 년 전부터? 아예 안 보이기 시작했어. 나도 끔찍하지. 매일 밤 아빠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걸 봐야 했으니….”


지훈에게서 확실한 조소가 나왔다.


“후…. 일말의 양심은 있으시다?.”


지훈이 1년 전 놀이터 사건을 떠올리고 문일을 비난한 의도를 수련은 쉽게 알 수 없었다.


“이런 얘긴 다 너한테만 하는 거다. 모두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고 뻔하지 다들 날 말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수련을 기특하다는 듯 또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는 지훈의 눈동자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수련은 마치 다시 생기라도 얻은 것처럼 자기 편이 되어주겠다는 지훈 앞에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귀신 같은 건 믿지 않아 내가 보고 듣는 건 환시, 환청이야. 진단을 내린다면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그런 게 나올걸? 그래도 미쳤다고 다 나쁜 게 아닌 거 같긴 해. 내 수많은 자아 중에 셜록홈즈 같은 자아도 있는 거지. 내가 정신을 잃거나 내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잠이 들거나 하면 그 셜록홈즈가 뿅 튀어나와서 사건을 해결하는 거야.”


꽤 진지한 표정으로 자가 진단까지 내리는 수련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짓는 지훈.


“거 어렸을 때 꿈이 미친년이었어? 미치지 않았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지훈의 말은 또 아랑곳 하지 않고 수련은 꼭 해야 할말을 전했다.


“그래서 말인데 지훈아, 지금까진 내가 미치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노력해 왔거든. 근데 지금은 내가 미쳐 날뛰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 정말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날 미치게 해줘. 마음껏.”


‘널 믿고 미쳐 날뛰어 줄게. 지금은 그 방법밖에 생각이 안 나.’


지훈의 눈동자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불안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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