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의 아버지 장례식장.
태극기가 엄숙하게 내려앉은 관, 그 위에 문일의 무궁화 휘장이 빛나는 제복 차림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경찰관들이 하나둘 빈소에 들어섰다. 각자의 제복 가슴팍에 작은 근조 리본이 걸려 있었다.
동료들은 절도 있는 걸음으로 관 앞에 나란히 서서, 두 번의 절과 헌화를 마친 후 수련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었어.”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지금 수련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현실은 멀어지고, 의식은 어디론가 방황하며 떠도는 영혼처럼 흔들렸다.
수련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정신은 무너진 둑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만신 성자가 경고했었다.
“정신을 놓으면 그것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녀는 그 경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핏기도 온기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인지조차 의심케 만드는 수련의 텅 빈 그릇에 망자들이 득실득실 몰려들었다. 그녀를 차지하려 어둡고 서늘한 기운들이 수련의 주변을 빼곡히 들어섰다.
그러나 어림없었다. 보이지 않는 부드럽고 강한 힘이 그녀를 감싸며 막아주고 있었다.
장례식장을 향하기 전, 임가영 교수는 지훈의 부탁을 떠올리며 수련의 곁에 머물렀다.
수련의 상복을 매만지던 그녀는 손끝에 쥔 부적을 상복 속으로 조용히 밀어 넣었다.
임교수는 지훈이 매번 가져와 머리숙여 들이미는 이 부적을 ‘이깟 종이’, ‘약속’ 또는 의미 없는 ‘대가’라고 불러 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가영도 소리 없이 빌고 있다.
‘이번에는 이깟 종이라도 제발 수련이를 지켜주기를.’
그 작은 부적이 지금의 수련을 지켜주고 있다.
부적의 간절한 온기가 단단하게 그녀의 온몸을 감싸 한 톨이라도 그녀의 정신이 흘러 나가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수련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고 인형처럼 그저 서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은 수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 다가오는데 수련은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를 보고 다들 혀를 차고 돌아설 뿐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 유난히 큰 울분으로 가라앉은 장례식장의 적막을 단숨에 무너뜨린 이가 등장했다. 그는 아버지의 절친이자 동료 형사였던 최창근이었다.
“문일아!! 내가 너 이렇게 만든 놈 꼭 찾아서 찢어 죽여줄 게 문일아!! 네가 이렇게 가면 어떡하냐, 이놈아!!.”
그는 영정사진 아래서 한참을 흐느끼며 울분을 쏟아냈다. 그러나 수련은 그의 고통스러운 외침에도 미동조차 없이 서 있었다.
눈물 한 방울 없는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최창근은 그런 수련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수련아! 내가 네 아빠 몫까지 다할게, 아저씨만 믿어!.”
바로 그 순간, 수련의 몸이 경련하듯 덜덜 떨리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그 가 잡은 손을 놓지 않아 수련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최창근의 품에 안겨 실신하였다.
수련은 그 순간 처음으로 아버지의 꿈을 꾼다.
지독한 시궁창 냄새를 맡고 달리는 아버지의 꿈.
**
쫓기는 쪽은 나인가? 아니다 나는 금발의 남자를 쫓고 있다.
결국 놈이 돌아본다.
왠지 여유 있는 얼굴.
그리고 옆에 또 다른 남자. 헉!
**
수련이 잠에서 깬다.
“수련아, 괜찮아?.”
“정신이 좀 드니?.”
“병원, 안 가도 되겠어?.”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었나보다. 눈을 떠보니 곁에 있던 엄마, 은교, 은정언니, 교수님, 그리고 최형사님...
‘여기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아빠가 돌아가셨어. 아빠는 억울하게 돌아가셨어!.’
수련이 드디어 흘러가고 방황하던 정신을 찾아 돌아왔다. 그리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문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분을 겨우 눌러댄다.
‘아빠! 제가 꼭! 아빠 억울함 풀어드릴게요!.’
수련의 꿈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꿈이 반복될수록 기억하는 것도 늘어났다.
남몰래 수련은 그것들을 기록하고 흐릿했던 꿈들이 영화처럼 선명히 새겨지기 시작했다.
문일의 장례가 끝나고 며칠 후 최창근은 수련에게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어이구 우리 딸내미 무슨 일이야?.”
더없이 친근한 말투로 수련을 부르는 최창근.
그러나 수련이 다짜고짜 던진 질문은 아무리 교활하고 계산적인 그일지라도 잠시 그 머리를 고장나게 할 정도로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총..총? 갑자기? 총?.”
게다가 수련은 그런 그에게 생각할 여유조차 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아버지 사건이 은폐, 축소된 거까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유가족으로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도 알권리는 있죠. 아저씨가 말씀하기에 곤란하시다면 다른 분께 여쭤볼게요. 수고하세요.”
수련은 대차게 말은 뱉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한참을 부들거렸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들고 아빠와 한 팀이었던 막내 형사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건다.
이현우 형사는 수련의 전화가 뜻밖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기뻤다. 팀장님의 딸 김수련. 현우는 그녀를 몇 년 동안 혼자 짝사랑해 왔다.
짝사랑이랄 것도 없는, 오다가다 마주치면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게 다였지만, 팀장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에 그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내가 그녀의 남자였다면. 최창근 저 늙은이가 아니라 내가 안아줬어야 했는데.’
그때 그 생각으로 속이 부글부글했던 그였다.
수련의 전화번호는 저장이 되어있었지만, 현우에게 직접 전화가 온 것은 처음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준비한 멘트를 던졌으나 무색하게도 썩둑 자르고 자기 할말부터 하는 수련.
“어 수련아 마음은 좀.” 썩둑-
-안녕하세요, 최형사님 저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그러나 수련의 질문은 이 형사도 대답이 망설여지는 곤란한 것이었나보다.
결국 이들은 곧 약속 시간을 잡아 비밀스럽게 이 형사의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멀리 수련이 보이자, 이 형사는 잔뜩 긴장하고 타이를 고쳐 맸지만, 수련은 누가 봐도 집에서 나온 차림으로 긴 머리를 나풀대며 이 형사의 차를 기웃대다 그를 발견하고 조수석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녀의 첫 말은 인사도 아니었고 예의도 없었다.
“아니 왜 전화로 할 수 있는 얘기를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그리고 만날 거면 널리고 깔린게 커피숍인데 돈 아끼려고 차로 부른 거예요?.”
수련이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모든 경찰에게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걸 알 리 없는 이 형사는 뾰족하게 구는 수련이 야속하게 느껴질법 했지만 그런 수련이도 귀여웠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다정한 표정으로 수련이를 향해 항복의 의미의 눈깜빡임을 시전하는 이현우 형사.
“뭐예요? 말로 해요 말로! 눈으로 말하지 말고!.”
그제야 이 형사가 결심했다는 듯 콧바람을 흥!하고 불더니 시동이 꺼진 차에 핸들을 꼭 그러쥐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정의의 편에 서겠습니다!.”
“나 왜 이해할 거 같지? 나 왜 이 형사님의 이 퍼포먼스와 생뚱맞은 결심이 다 이해가 되지? 역시 나 미친년 맞나봐.”
수련이 이 형사의 짧은 한마디를 듣고도 뭔가 감을 잡았다.
“그러니까.. 정의의 편에 서겠다는 이형사 님의 그말은 제 질문의 답인거죠? 결국엔 누군가 총을 쏘긴쐈다?.”
이제 이 형사는 장난기도 웃음기도 다 빼고 수련을 향해 진지하게 묻는다.
“근데 이거 정말 위에서도 철저하게 기밀로 덮은 건데 어떻게 아셨어요? 현직 경찰이 총을 뺏겼다는 것 만으로도 비난을 받을거라고 덮으라고 했지만….”
이 형사는 뭔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수련은 오히려 개운한 표정으로 그 말을 이어받았다.
“총은 현장에서 발견됐죠? 탄피가 두 개 나오지 않았어요?.”
수련의 말에 이 형사는 작은 승용차가 들썩일 만큼 튀어 올랐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승용차 안을 둘러보며 유난스레 목소리마저 낮췄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위에 보고도 탄피는 하나로 올라갔어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어라? 나랑 최 형사님뿐인데?.”
그 말끝에 수련의 눈가가 쓰라리다는 듯 괴롭게 일그러졌다.
“이현우 형사! 결국 당신도 한패였어?.”
**
현재 수련과 지훈
수련은 일부러 감정 없이 담담히 설명해 줬다. 아빠는 분명 경찰 내부 조직에 의해서 살해당했고, 거기에 금발 머리 남자가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심어줘야 했다.
절망적인 표정의 지훈, 듣는 내내 푹 숙인 고개를 붙잡은 뒤통수에 낀 깍지를 풀지 못하고 있다.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길은 하나뿐이다.
지훈은 마침내 커다란 몸을 일으키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마치 마음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난 후의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공주님 나는 이제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수련은 갑작스러운 지훈의 태도 변화에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든든하고 고마웠다.
“내 편이 돼주고 날 믿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 지훈아.”
수련은 자연스레 지훈에게 폴짝 뛰어가 안겼다.
한 팔에 안겨 들어온 수련이었지만 지훈은 그 팔을 어찌 감지도 못하고 허공에 띄운 채 얼어붙었다.
수련이 잠시 후 자신이 지훈에게 안겨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져 거실로 향하며 급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야 신지훈 너 근데 싸움은 좀 하냐?.”
쌩뚱맞은 질문이었지만 지훈에게는 반가운 질문이었다.
지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양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보이지 않는 검을 쥐듯 손가락을 모았다.
그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동작은 마치 공기를 가르는 물결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결정적인 단 한 방을 담고 있었다.
비장하고도 단단한 표정의 지훈이 진지하게 수련을 향해 진심을 전한다.
“이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야. 너를 향한 내 마음의 연장선이지.”
그러나 수련은 그 자세로 미동도 없는 지훈을 신기하다는 듯 살피며 묻는다.
“그 검 나만 안 보이는 거 아니지?.”
발끈하며 일어선 지훈.
“이건 고행의 검술, 무(無)에서 시작하는 검 동작이야! 내가 너도 알다시피 학교도 안 다니고 절밥만 먹었지만, 다행히도 우리 주지 스님께서는 밀교에 심취해 계셨기 때문에 밀교의 모든 단련법과 수련법을 전수해 주셨지. 장작만 패다 온 게 아니라고!.”
지훈이 자신의 대서양같이 넓은 가슴 한편을 두드리며 자신있게 말하자 수련은 또 어느새 눈이 하나로 모여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잡았다!.”
지훈의 낮은 미성이었다.
동시에 수련은 지훈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안겨 열기로 가득한 얼굴만 치켜들었다.
수련의 눈은 지훈의 깊은 눈에 홀린 듯이 빠져들었고. 지훈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유 있게 두 팔로 꼭 수련을 끌어안았다.
“나 쎈 놈이야, 더 이상 안 쫄 거니까 나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