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가 누구게?

9시 47분

by 월하수희

12월의 초하루.
강남의 유명한 호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화롭고 아름다운 자쿠지.

샴페인을 손에 든 젊은 남녀들을 위해 디제이 박스가 설치되어있었고, 초저녁부터 디제이가 신나는 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띄웠다.

이날 수련은 지훈을 그렇게 버려두고 온 것에 대해 마음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애써 그걸 털어버리려는 듯 그 어느때 보다 신나게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저기 호화로운 호텔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삼총사들.

뜨거운 자쿠지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음악도 듣고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스위트룸에서도 음악은 이어졌다.

그들만의 파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스위트룸으로 옮겨진 디제이 박스, 모든 것이 셋팅되어있는 스위트룸에는 커다란 미러볼을 중심으로 반짝이는 테이블위에 값비싼 샴페인들이 줄 지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련도 이 모든 분위기가 분에 넘칠 만큼 만족스러웠지만 딱하나 아까부터 거슬리는 것은 그녀의 파트너 정남의 스킨쉽이었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아무리 대화가 통하는 상대여도 마음이 다른곳에 가있으니 그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파트너와 신나게 놀고 있는 은교를 슬쩍 불러내는 수련.

“은교야 나 좀 불편해서 그러는데 나 먼저 가면 정말 분위기 깨겠지?.”

은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발작하며 잡아먹을 기세로 수련을 노려본다.

“너 이 가시나 또 다된 밥상 뒤집어 엎을라 카는기야? 미쳤어? 이게 얼마짜리 파틴줄알아? 샴페인이랑 호텔값만 해도 수천만원이야!.”

“알아. 그래서 너무 미안한데 그러면, 나 잠깐 어디 좀 나갔다 오면 안 돼?.”

은교가 수련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뾰로통한 얼굴로 되묻는다.

“어딜? 언제? 몇 시에? 얼마나?.”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은교의 표정을 보고 수련이 잽싸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정확히! 9시30분에 나갔다가 30분 만에 돌아올게!.”

“뭐야 너 똥마려? 여기서 똥싸면 쪽팔려서 그래? 여기 화장실 많아. 밑에 내려가면 1층에 화장실도 있어. 갔다와 그라믄.”

은교는 30분이라는 수련의 말에 별생각 없이 대답하고 자기 파트너에게 돌아갔다.

그때 성훈이 황금색 샴페인을 들어 올리며 모두를 불러 모았다.

“다들 모이자, 한잔씩 해야지!.”

모두 비어있는 잔을 들고 둥그렇게 모였다.

작은 샴페인 잔에 거품 반 술 반, 단숨에 털어 넣은
이들은 또 한 번 잔을 채웠다.

수련이 물었다.

“아르망디는 클럽에서 많이 봤는데 이거는 돔페리뇽 크리스탈? 어쨌든 빈티지 보다 좋은거지?이름부터가 빈티지? 크리스탈! 이잖아.”

현정이 수련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신 대답해 줬다.

“우리 수련이 이렇게 세상물정을 잘 몰라. 그럼에도 이렇게 눈치는 또 빨라요. 맞아 그게 두 단계 더 비싼 술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참에 이것저것 다 먹어봐.”

성훈이 웃으며 수련의 잔에 크리스탈을 따서 잔을 채워주는데 성훈의 오른쪽 손목을 보고 수련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오빠 오빠는 손목에….”

술을 따라주려던 성훈이 수련의 말에 움찔하며 그 손을 걷어가는 바람에 비싼 샴페인을 바닥에 흠뻑 쏟고 말았다.

허둥지둥 타월을 가져와 대충 술을 닦아 내고 자기 손목에 시계를 다시 한번 매만졌다.

“어? 아.. 이거?.”

성훈이 막 무슨 변명을 하려던 그때. 수련이 먼저 말을 이었다.

“무슨 손목에 벽시계 같은 그런 큰 시계를 하고 다녀요? 안 무거워요? 그 브랜드 비싼 거 알긴 아는데 진짜 무거울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제야 성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수련에게 다시 술을 따라준다.

“여자는 반지, 목걸이, 가방 꾸미고 있는 척 티 내고 다닐 게 많지만 남자는 시계 하나야.”

옆에 있던 현정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성훈의 두꺼운 팔뚝을 훑듯이 쓰다듬어 간다. 마치 구렁이가 나무를 올라타듯 성훈을 거침없이 훑어댄다.

“정말 무거워 보이긴 하네, 나 한번 해 봐도 돼?.”

성훈이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자기, 자기는 내가 더 좋은 거로 사줄게. 여자는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에요. 우리 저쪽으로 가서 놀까?.”

그렇게 한 쌍의 커플은 구석으로 사라지고 시간은 아홉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울려대는 지훈의 카톡을 수련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메시지.

-제발 일찍이라도 나와줘-

너무나 여유롭게 비트를 타며 흔들고 있는 성훈을 은정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지켜보다 결국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이 대단한 파티에서 언제 수련 이만 몰래 빼내 갈 거냐니까? 계획이 있긴 있어?.”

“걱정마세요. 지금 들고 있는 저 잔, 저것만 다 마시면 알아서 뻗을 거예요.”

수련은 정남이 따라준 새로운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저기 들어있는 게 뭔데?.”

“저건 그냥 수면제예요. 같이 넣은 게 중요한 거지. 걱정 붙들어 매십쇼. J가 저 여자를 천국에 보내줄 거예요.”

성훈이는 무엇을 상상하는지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반짝이는 조명을 향해 기분나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런 성훈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은정의 눈이 커다래지고 그의 머리털을 잡아 뽑으며 거침없이 물어본다.

“너 근데 이거 뭐냐? 새치야? 잘못 봤나 싶었는데 뭐 이렇게 뭉텅이로 금발이 있냐?.”

그러자 성훈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더니 뒤통수를 쓸어댄다.

“아! 골고루 안 먹었나 보네. 아 사실 누나 새치가 아니라 저 원래 전부 탈색했어요. 몇 번을 탈색했더니 이제 검은 머리가 어색할 정도예요.”

“그럼 그냥 탈색한 채로 나오지 그랬어? 아~ 재벌2세 이미지로는 좀 안 어울려서?.”

“그런것도 있지만. 그냥 너무 튀잖아요. 흐흐..
그리고 누나 그거 알아요? 검은 머리를 잠깐 하얗게 하는 건 힘들어도 탈색한 머리를 하루 정도 검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결국 수련은 애써 얻어낸 30분의 찬스도 써보지 못하고 어느샌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런 수련을 자연스럽게 예약해둔 다른 호텔 방으로 데리고 간 정남.

남자들은 모두 각자 향정신성 의약품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정남에겐 성훈의 이러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남은 호스트바 선수였다. 최고급 호텔파티에서 마약도 즐기고 지난번 만남에서 꽤 마음에 들었던 그녀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아니, 꼭 그 이상으로 망가뜨려야 한다는 달콤하다 못해 끈적거리는 이 절대적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각성상태로 흥분이 최고조로 달한 정남은 기절하듯 누워있는 수련을 그대로 덮치려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수련은 수면제에서 너무 쉽게 깨어나 버렸다. 눈을 번쩍 떴다.

정남은 당황했으나 수련의 다음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조용히 정남에게 부끄러운 듯 말했다.

“나 술에 너무 안 취해서 부끄러워서 그런데 언더락으로 센 술 아무거나 가득 좀 따라주면 안 될까?.”

여태껏 보지 못한 수련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정남은 냅다 위스키를 꺼내는 동시에 주머니에서 성훈에게서 받은 것을 꺼내 왕창 부어 섞어서 건넸다.

'여기서 더 먹이면 완전 뿅 가겠지?!,’

시간은 9시 47분. 이미 달은 자취를 감췄다.

어둠에 가까웠던 악인이 일순 악귀에게 먹혔다.

수련이 욕조를 향해 간다.

정남이 그런 수련을 보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수련의 현재 시점>

그가 말한다.

“몇 조각으로 잘라 줄까?.”

‘환청이라기엔 너무 생생해. 표정 입 모양 말투. 목소리. 지금까지 봐왔던 흐릿하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랑은 확연히 달라. 이건 그냥 사람이야. 나를 죽일 거야!.’

수련은 진심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가 들고 왔던 백팩이 사라졌다. 수련의 눈앞에는 녹슬고 커다란 공구함이 있다.

그 안에 쇠망치와. 회칼, 절단용 톱 그런 것들을 뒤적이는 남자.

수련은 알몸으로 무릎꿇고 빌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저 죽으면 진짜 저희 엄마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제발요. 신고도 안하고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수련은 간절했다. 살아 나가야 했다.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재벌2세 들이 아니었던 거야. 그냥 연쇄살인마 같은 거야. 날 죽이고 출국하면 그만인 거야.’

남자가 수련을 싸늘하고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또 짧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죽일 거야. 날 죽일 거야.’

“엄마한테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주세요.”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당시의 수련의 부탁이었다.

남자가 피식 웃더니 수련의 침대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를 올라탔다.

“괜찮아 너도 좋을 거야.”

잠시지만 평소의 정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되었든 수련은 결코 원치 않는 결과일것이다.

‘뭐지? 성폭행하고 죽이려는 건가? 너무 끔찍해. 제발.. 하나님.. 누구라도 제발 도와주세요…. 지훈아 미안해,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수련은 반항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악스러운 남자의 손길에 가녀린 어깨가 나뭇잎처럼 떨어졌다.

질끈 감은 두 눈을 타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죽을수 없어...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당할수 없어. 내가 할수 있는일이 정말 없을까?.'

텅빈 인형 처럼 손끝하나 마음껏 움직일수 없었던 수련. 자기 몸 위에 남자가 어디를 만지고 있는지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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