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성과 배롱나무
숲길을 걷다 멈춰 선다. 둥글넓적하게 펼쳐진 입들의 한가운데로 탱글탱글하니 윤기 나는 초록 알갱이들이 소복이도 모여있다. 잘 여문 옥수수알갱이처럼 오밀조밀 꼭 붙어있는 열매를 가진 그 식물은 천남성이라 한다. 사약 재료로 쓰였다는 식물이다. 한라수목원 숲 해설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알게 된 천남성, 그날 이후로 숲길을 걷다 천남성을 종종 마주한다. 글을 막 알아가는 아이가 더듬더듬 지나는 간판을 읽어내고 기뻐하듯, 천남성을 알아보는 재미가 있다.
- 잠깐, 이거 사진 좀 찍고, 신기하다, 저기도 있네.
나무로 우거진 숲길을 걷다 발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몇 발짝 앞서가던 발걸음이 뒤를 돌며 한소리를 한다.
- 뭐지? 왜 천남성을 그렇게 찾는 거지?
- 아니까, 보이니까, 반갑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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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눈길로 돌아보는 발걸음에 조심하라는 눈길을 돌려줬다. 수확의 재미를 즐기는 이가 저 아이도 업어 갈까 미심쩍다는 눈길이, 거둬지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슬쩍 한번 웃어줬다.(내 맘 나도 잘 모른다는 듯이) 상대의 크지 않은 눈이 옆으로 길게 가늘어진다.
근 25년째 한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우린, 말없이 서로의 마음을 간혹 읽을 줄도 알게 되었다. 무슨 초능력이라도 생긴 거면 좋으련만, 그런 건 아니다. 서로의 불편을 꼭 집어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미묘한 상대의 불편을 알아채고선 그 끝의 꼬투리를 부여잡는 순간이 어쩌다 생긴다. 그 약간의 일그러짐을 즐기고 싶다는 못된 심보가 스멀거리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순간을 누군가는 즐기는 순간, 상대의 약을 올리며 불편한 표정을 잠시 즐긴다. 잠시여야 한다. 즐겁다고 무작정 놀려대다간 위험해질 수 있다. 적정한 때에 부여잡은 선을 느슨하게 놓아줘야 한다. 자칫 그 선을 길게 부여잡고 있다간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구차한 용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생활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천남성, 좀 이름난 중국집의 간판에 굵은 붓글씨로 적혀 있을 것 같기도, 천왕성 막냇동생쯤의 이름 같기도 한데, 왜 천남성일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천남성(天南星), 남쪽 하늘의 별이라니 별과 관련이 있긴 하다. 덩이줄기가 둥글고 희어 하늘의 별 노인성(老人星)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노인성이란 어떤 별일까? 천문학적 지식이라곤 없으니 또 찾아볼 수밖에.
AI에 물어봤다. ‘행성, 노인성에 대해 알려줘, 두 세줄 분량으로.’ 한 줄 적어 넣었더니, 뚝딱하니 주르륵 답이 내려온다. ‘노인성(Canopus))은 남반구 하늘에서 시리우스 다음의 두 번째 밝은 별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등 남쪽에서만 겨울, 초봄에 관측할 수 있으며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길한 별로 여겨진다.’라고 한다. 매우 낮게 뜨는 별이라 만나기 쉽지 않다고. 낮게 뜨는 별이라니 마음이 더 기운다.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별, 노인성의 계절이 돌아오면 만나러 가봐야지.
천남성은 평화와 장수를 상징하는 별을 닮았다는데 어째 그 뿌리에 독성이 있어 조선시대에 사약 재료로 쓰였다 한다. 꽃말이 현혹, 비밀, 여인의 복수라나. 장희빈이 천남성이 든 사약을 받고 품위 없이 허물어졌다지. 숲 곳곳에 걸린 현수막에 멧돼지와 뱀과 함께 나란히 자리할 만한, 위험한 식물이긴 하다. 한가운데 초록으로 윤이 나는 열매는 가을에 붉은색으로 익는다 하니 가을 숲에서 다시 만나봐야지.
몸에 닿는 공기가 달라졌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마냥 아쉽지만 또 다른 모습의 계절이 기다려지긴 한다. 어느 곳으로든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모양이 달라지는 가로수를 골라보는 재미가 제주에는 있다.
제주 서에서 동으로 부지런히 달리다 보면 분홍색 꽃 무리가 올라앉은 배롱나무를 가로수로 만날 수 있다. 매끈한 몸피에 피워 올린 짙은 분홍색 꽃 무리가 도로변에 가득이라니, 배롱나무는 절이나 서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다. 그 속과 겉이 다르지 않다 하여 그 옛날 선비들이 좋아했고 선비 나무라 불리기도 했단다. 풍광 좋은 곳에 자리한 절을 한 번씩 가서 매끈한 몸피만 겨우 봐왔는데, 그 꽃 무더기를 제주에서 기어이 만났다. 한여름 따가운 볕에 100일 동안 짙은 분홍색 꽃을 무리 가득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지는 그 무리를 보러 그 길을 자꾸 지나게 된다.
배롱나무의 품위 있는 호위를 받으며 숲길을 걸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