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
어 에취, 눈물, 콧물, 훌쩍훌쩍 비염의 계절이 돌아왔다. 용케도 안다 몸은.
공기가 달라지고 있다. 바람이 무리 지어 보내오는 기운이 다르다. 태양은 늘 제 역할에 충실해 변함없이 따가운 햇살을 내보내고 있지만, 바람이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무의 잔가지를 흔들어 일렁이게 하고 그 무리를 키워간다.
이제 만나게 될 제주의 가을, 늘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 한참을 고개 들어 올려다보게 하는 구름, 사진을 찍으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나타나는 하늘, 가을하늘을 기다려본다.
바다를 옆에 두고 올레길 4코스를 걷다 노란 커피잔을 들고 있는 돌하르방을 만났다. ‘어라, 귀엽네’ 찰칵, 하고 조금 더 걷다 보니 노란색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10년도 더 전에 맥심 모카커피 광고를 찍었다는 모카다방이다. 마침, 한참을 걸어온 다리가 묵직해져 쉴 곳을 찾던 터라 쨍한 노랑이 반가웠다.
노란 집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작은 공간 곳곳에 지난 시간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눈물자국 묻어난 못난이 인형과 미닫이 양문이 달린 텔레비전, 세월이 묻어 더 우아해 보이는 자개장과 아주 작은 책걸상. 손때 묻은 지난 시간의 푸근함이 카페 안을 지키고 있다.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 저 자개장, 우리 할머니 방에 있었는데, 재봉틀도. 지금도 있으면 좋겠다.
- 혹시 있을까?
- 없지, 당연히.
아 이젠 없는, 몰라보던 것을 알아채는 순간의 마음이란, 정체 모를 어떤 뭉글한 것이 잠시 내 곁을 어른거린다. 오래되고 묵은 건 낡고 어울리지 않는다, 해서 정리하고 버렸던, 지켜내지 못했던 것을 모카다방에 앉아 아쉬워한다.
다방 안, 가운데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쉼 없이 무언가를 토도독거리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 우리 아이들 또래로 보인다. 다방 안의 아이.
- 우리 애들도 카페에서 저러고 있겠지?
- 그르지.
- 다방이 정겹네, 아 우리 집이 다방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생각나?
- 그랬지, 동네 다방.
맥심 모카다방 광고보다 더 오래전 잠시, 동네 다방을 운영한 적이 있다. 노랗고 길쭉한 봉지 커피를 집에 쌓아두고 집을 찾아드는 이에게, 지나는 이에게 커피잔을 내밀었었지.
지금은 20대가 된 아이들이 아직 작은 아이였을 때, 우리 집은 노란 유치원 버스가 아이들을 태우던, 바로 앞집 1층이었다. 헤헤 웃으며 작은 손을 흔들던 아이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 엄마들은 1층 동네다방을 찾아들었었지.
약속이고 뭐고 차려입고 꾸미고 할 거 없이, 바빴을 아침 준비 모습 그대로 동네 다방에 들어선 엄마들. 다방의 인테리어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똑같은 구조의 대충 엇비슷한 집안, 아이들의 흔적이 곳곳에 흐트러진 거실에 편히 주저앉아 갈색 커피를 마셨었지. 간판도 메뉴판도 없지만 리필은 가능했던 동네 다방.
아침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했었지. 일고여덟 명쯤, 네모난 거실에 둘러앉아 달짝지근한 커피를 홀짝이던 어린 엄마들. 1층 집에 살던 2년 동안 운영했던 동네 다방. 아이들의 놀이시간을 쫓아 놀이터로, 정자로 커피 배달을 나가기도 했었지. 커피잔에 묻어오는 이야기에 웃음에, 흐뭇해하던 시간들. 집에 사람이 있을 땐 항상 열려있던 1층 다방, 뛰어놀다 목마른 아이들이 ‘이모, 물 좀 주세요’ 하며 들락거리곤 했었지. 모두가 어렸던 시간이다.
아이들은 자라 그 옛날 기억은 없던 듯 서로 데면데면한 어른이 되어 가지만, 엄마들은 그 인연의 반쯤을 이어오고 있다.
가을로 향해가는 창가에 앉아, 비가 몰려오는 소리를 남기며 지나는 비행기의 꼬리를 따라가다,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훌쩍 제주로 와버려 마주 보고 커피를 마시려면 시간을 크게 내어야 하고 저 지나는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 계획은 늘 마음 언저리에 있다지만, 일단 메시지로 커피 안부를 전해본다.
다방이 전해주는 옛이야기에 힘을 얻고 또 걸으러 나선다.
도로표지판 기둥에 기대어 펄럭이는 올레 리본.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관식이가 (애순이의 마음을 얻고자) 더듬더듬 기억해 내던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게 보내온다. 깃발이 손수건처럼 팔랑거린다. 노랑 손수건처럼.
비염이 올려 보낸 재채기에 또, 훌쩍거림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