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의 연결과 상실을 아는가

그냥 그렇게 되는

by 반점

‘당신은 어깨가 좁아, 목이 어깨에서 너무 나갔어, 뒤로 보내봐. 배는 목보다 한참 더 나왔군, 힘이라도 좀 줘보지 그래.’ 내뱉고 보니 내게도 해당하는 사양들이다. 굳이 분류해 보자면 그대는 사이즈가 중이요, 나는 소.

새벽에 또 잠에서 깼다. 왼쪽 오른쪽, 거꾸로 몸을 골고루 뒤집으며 아무리 자세를 달리 잡아도 잠은 점점 멀리로 나가버린다. 눈을 감고 잠을 거듭 불러봐도 이런저런 생각들만 머리를 헤집고 나온다. 포기, 일어나 앉아 스탠드를 낮게 켠다. 폴 오스터의 마지막 작품 『바움가트너』를 읽어간다. 70대의 은퇴한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이야기다. 10여 년 전 아내 애나가 갑자기 죽은 후 느껴지는 상실감에 환지통(절단된 신체 부위에서 통증을 느끼는 증상 )을 떠올리는 바움가트너. 바움은 독일어로 나무, 가트너는 정원사라 한다.

회녹색의 양장본 표지에 노년의 얼굴 형상과 그 안에 그려진 정원이 있다. ‘바움가트너는 기억의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얽혀 있는 삶의 단편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폴 오스터가 평생 동안 다뤄 왔던 주제인 글쓰기와 허구가 만들어 내는 진실과 힘, 그리고 우연의 미학에 대한 사유가 간결하고 섬세하게 집약된 이 마지막 유작은 죽음 앞에서 써 내려간 상실과 기억에 관한 소설’이라고 출판사(열린책들)에서 소개한다.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날이 밝아온다. 책의 마지막, 옮긴 이의 말에서 정영목 번역가가 이야기해 준다. ‘마흔 넘어 얻은 첫 자식을 보는 순간, 바움가트너의 아버지가 써 내려간 편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깨닫는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수많은 작은 것들과 연결된 작은 것>이다. 이때 아버지가 깨달은 바로 이것이 폴 오스터라는 작가, 그리고 이 소설 『바움가트너』를 지배하는 태도의 핵심인 듯하다.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오스터의 허세 없는 목소리의 비밀인 셈이다.’라고.

역시 큰사람은 큰사람을 알아본다. 여전히 작은 사람인 나는 읽어지는 재미만을 생각했다. 잘 넘어가는 책장과 읽어갈 때와 책을 덮었을 때의 느낌만을 취해왔다. 느낌에 생각 더하기를 애써 하지 못했다. 작은 것과 연결해 준 번역가가 고맙다.

책장을 덮으니 이미 아침이다. 돌려진 등이 눈에 보이는데 뭔가 이상하다. ‘간밤 책 읽기에 시력을 더 잃었나?’ 싶어 손을 뻗어보니 속옷의 이음새가 만져진다. 일반적으로 그 이음새는 몸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을, 돌려진 등은 그걸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등짝을 한 대 쳤다.

“얘 왜 뒤집어졌지?”

“아아 왜 뭐 어?”

등짝의 웅얼거림에 속옷을 힘껏 당겨 고무의 맛을 알게 해 준 뒤 뒤집힌 속옷의 이유를 다시 물었다.


“어? 당신이 그랬나 보네”

어이 상실이라 했던가, ‘내가 왜에에!’라고 내지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순간 가라앉았다. 막 『바움가트너』를 읽은 참이었고 하루의 시작 즈음이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그럼 더 문제지, 그런 줄도 모르고 자고 있으니”

아직 잠이 묻은 등짝을 침대 발치 쪽으로 쓱 밀어내며 중얼거려 본다. ‘어이 중사이즈, 그대는 수많은 작은 것의 연결과 그리고, 상실을 아는가?’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헛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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