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호명의) 하루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

by 반점

대기 번호 155번, 아직 12시가 되기 전인데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단다. 일 년 중 다섯 달만 영업한다는, 검고 진한 콩물에 브로콜리 생면의 조합이 환상이라는 제주도민 맛집, 통일가든 앞이다. 식당 앞 나무 그늘에는 파랗고 빨간 플라스틱 의자들이 줄을 지어 놓여있고 물론, 그 의자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꼭꼭 채워져 있다. 길을 건너갔다. 통일가든을 마주하고 있는 먼나무 그늘 안에 둥글게 들어앉았다. 그늘 아래이긴 하지만 칠월의 공기는 살을 파고든다. 목마름 퇴치용으로 구입한, 자잘한 얼음이 꼭꼭 채워진 커피로 간간이 식도를 식혀주다 옆에 놓고 책을 펼쳤다.

검은 글을 읽어간다. 어쩌자고 이 책을 한낮 불볕더위 아래 펼쳤는지, 숨이 밖으로 나올 새 없이 안으로 자꾸 삼켜 든다. 한 번씩 고갤 들어 더운 숨을 뱉어내 본다. 백번 안쪽의 번호들이 백을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옆에 앉은 이의 오늘의 뉴스 얘기에 ‘그래? 그렇군’ 추임새도 넣어주고 그렇게 숨을 한 번씩 쉬고 다시 읽어간다. 작가가 쓴 소설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설을 쓰기 전에 떠올랐던 질문과 그것이 이어지는 과정과 그 후의 이야기. 소설이 출간되고 작가는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된다’라고 쓰고 있다. 그 후 다시 쓰기를 통해 연결되기를 이야기한다. 한강 작가의 에세이 『빛과 실』의 앞부분을 읽어가다 눈빛이 멍해지고 있다.

149번, 150번, 151번이 차례로 불린다. 책을 덮고 일어서 길을 건너갔다. 선 채로 안을 기웃하며 몇 분을 더 기다려 155번이 호명되었을 때 통일가든 안으로 들어섰다. 먹는 내 묽어지지 않는 진한 국물, 연한 브로콜리 색의 쫄깃한 면발, 정갈한 반찬까지 기다림이 억울하지 않은 맛이었다. 검은 표지의 책을 옆에 두고 그렇게 또 먹었다. 살을 파고드는 더위 아래 올레길을 걸을 수는 없어 카페를 찾아 나섰다.

통일가든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새로 지어진 건물을 통과해 구옥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였다. 바다로 향한 구옥을 개조해 만든, 작은 책방 겸 카페로 운영 중인 시인의 집. 시집, 아트북, 주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책들 순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북어와 소품들이 책방의 분위기를 맞춰주고 있는 공간, 바다로 난 창가에 앉았다. 반짝이는 윤슬이 바람을 타고 밀려드는 중이다. 시집과 커피를 앞에 두고 윤슬에 눈길을 줬다. 그 일렁이는 반짝임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이상하다. 멀미가 나는 듯하다. 더위에 멍해진 머리가, 노화로 흐려지는 머릿속이 만든 착각일까. 읽다 만 책이 마무리되지 않아서일까?

“뭐지, 왜 멀미가 나는 거 같지?”

“지금 간조 시간이네, 물이 빠지는 중이지”

물음을 향한 답이 아니었다. 각자의 혼잣말이 내겐 답이 되어 돌아왔다.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깊이 듣는 사이가 아니다. 각자의 혼잣말을 하다 보면 어쩌다 맞닿는 지점이 생긴다. 그럴 땐 간혹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또 각자의 혼잣말을 이어 간다.


물은 먼바다를 향해 점점 빠져가는 중이었고 윤슬은 바람을 따라 나를 향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내 멀미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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