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쓰임

어딘가에 있을 너의 자리는

by 반점

배란통인지 아랫배가 뭉근히 아파 온다. 저녁밥 때가 되어가지만 먹기도 하기도 싫다. 혼자 몸이었으면 진작에 누워 잠을 청했겠지만, 집에 저녁밥을 기다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안 먹고 싶어’를 일단 외치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 모양을 보던 집사람 1이 툭 던진다.

“삼치 한 토막 있던데 그거 구워서 막걸리 한잔할래?”

순간 몸이 절로 일으켜지더니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왼손은 아랫배에 둔 채로.

“호박도 있는데 호박전 부칠까?”

“좋지”

냉장고 안을 한눈에 둘러보고 곁들이 재료를 줄줄이 꺼낸다. 오이는 동글납작하게 썰고 방울토마토는 반을 가른 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뿌려준다. 집사람 2가 좋아하는 파프리카와 오이고추도 생으로 먹기 좋게 자른다. 냉장고 안을 마저 들여다보던 집사람 2는 ‘이것도 먹을래’라며 쪄둔 단호박을 꺼낸다. 그 단호박으로 말하자면, 귀인이 어느 날 내게 가방 가득 묵직하니 안겨준 것이다.

여름 올레길을 걷다 보면 어릴 적 나를 닮았다는 노란 꽃과, 그 사이사이 넝쿨이 푸릇푸릇하게 우거진 밭을 종종 마주한다. ‘저 넝쿨이 돌담을 넘어 길가로 뻗어준다면 내가 그 열매를 가져도 될까?’ 잠시 도둑놈 심보가 되어 본 적이 있다. 두 손을 모으면 꼭 안길 듯 둥글한 그 진녹색 열매를 좋아한다. 그런 단호박을 내게 한 아름 들려준 이가 있으니, 귀인이랄 수밖에.

귀인의 호박을 찜기에 쪄서 냉장고에 식혀두었던 것도 마저 꺼낸다. 그 사이 밥은 주메뉴의 자리를 내어주고 손길 뜸한 사이드 메뉴가 되어있다. 오늘의 주메뉴는 탄산이 거의 없고 달지 않으며 약간의 시큼함과 부드러운 뒷맛이 있는 미색의 음료, 하나로마트에서 데려온 초록 뚜껑 제주 막걸리이다. 우리 쌀로 만든 생 유산균 제주막걸리는 우리의 제주 정착을 적극 돕고 있다. 물론 막걸리가 의도한 바 전혀 아니겠지만 그 존재는 우리에게 유용하다.

배가 언제 아팠던가, 막걸리에 자리를 내어준 밥과 함께 한쪽 귀퉁이로 작게 밀려나 있는 나의 통증. 잔의 수가 늘어날수록 통증의 자리는 점점 더 뒤쪽으로 밀려나고 있다. 역시, 술은 근심을 옅게 한다(물론 잠시의 증상임을 알고 있다).

그 따끈한 저녁밥 시간을 보내고 자리에 누우니 아랫배 쪽으로 슬그머니 밀려드는 기운이 있다. ‘아 아직 거기에 있었구나. 잠시밀어두기만 했구나. 내 몸에 머물러야 할 시간이 있으니 그 시간을 지나야 하는구나’ 싶다. 살살 아랫배를 문지르며 내게 머무는 통증을 마주한다. 단호박과 막걸리를 향해 내밀었던 손을 나의 통증에 내어주며 잠을 청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어떤(호명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