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한다.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누구나 불행을 두려워한다. 불행하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은 인간의 삶을 묻는 물음에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대답이 된다. 그렇다. 인간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런데 행복하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될 죽음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죽게 되면 생명은 멈추고, 우리의 의식과 정신은 더 이상 육체 안에서 활동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과 같다. 무엇이 죽음인가? 바로 행복을 잃어버리는 삶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 때 행복을 잃어버리는가? 그것은 행복을 찾는 것을 포기할 때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불행은 언제나 닥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는 불행과 마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종종 그러한 불행 앞에서 행복을 찾는 것을 포기해 버릴 때가 있다. 더 이상 앞으로 가기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모든 걸 놓아버리고 멀뚱히 멈춰 선 채 불행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것이 죽어있는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에게는 가끔 불행한 순간과 상황에서도 행복을 갈망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낙관적이고도 진취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고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 전쟁과 독재라는 사회적인 불행과 어둠 속에서 여전히 행복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다룬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우리에게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과거의 아픔을 다시 들어냄으로써 알려주고 있다.
위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독일은 사실상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던 시기이다. 오히려 짙고 두꺼운 어둠이 독일을 온통 뒤덮고 있었던 시기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무고한 자들의 학살과 무의미한 고발, 소모적인 전쟁이 공존하던 이 끔찍한 시기에 주인공 그래버는 러시아 전선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고향땅인 독일로 운 좋은 휴가를 나오게 된다. 그런데 부모님이 계시던 마을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것을 발견하고, 여전히 도심 곳곳에 서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폭격이 가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다. 여느 사람이라면 정말 미쳐버릴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래버는 멈추지 않고 부모님의 소재를 찾아 헤맨다. 폭격으로 건물의 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우체국에 들어가 부모님의 소재를 묻고, 두려움에 떠는 이웃의 문을 힘껏 두드리며 묻는다. 죽음의 전선에서 돌아온 그래버인 만큼, 행복에 대한 갈증은 그에게 더더욱 강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부모님의 생사여부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진다.
죽음이 도사리던 전선에서 휴가를 얻어 행복한 삶을 그리던 그래버. 사실 전쟁터에 투신한 것이 2년은 족히 지난 그래버에게 죽음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행복을 기대했던, 아니 적어도 전선보다는 평화롭기를 기대했던 고향에서 수없이 목격한 것은 ‘죽음’이었다. 그것은 그동안 겪어왔던 죽음과는 또 다른 죽음이었는데, 바로 ‘일상의 행복을 파괴하는 죽음’이다. 전선에서는 행복을 기대할 일이 없었다.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선과 다르게 당연하고 일상적인 행복과 평화가 있었던 이곳 도심에는 그것들을 파괴하고 갈가리 찢어버리는 죽음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전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할 수 있었으나, 도심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폭격당하는 것을 두 손 놓고 지켜봐야 한다는 것. 그래버에게 불행은 어딜 가나 공존했으나, 행복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지옥에서의 고통’과 ‘천국에서의 고통’처럼 그 둘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chweinfurt%E2%80%93Regensburg_mission
“저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만 안 들릴 뿐입니다.” - 253p
우리는 불행할 때야말로 행복을 찾고 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행하지 않을 때는 행복의 소중함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밤 동안 ‘운 좋게도’ 죽지 않고 잠에서 깨어 눈을 뜨는 것,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아직까지도 지구에 남아있다는 것, 우리의 자유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각 한 쌍씩의 팔과 다리가 있다는 것 등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하룻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 노인들, 그리고 도시 매연과 미세먼지로 마스크 없이는 도저히 숨 쉴 수가 없는 여러 도시들을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가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분명한 행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이라도 일단 배가 부르면 쳐다보는 것조차 싫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불행이라는 행복의 결핍 안에서 비로소 행복의 가치를 느끼는 것.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뫼비우스의 띠가 아닐까?
위 소설에서 불행하기로는 주인공 그래버도 만만찮다. 그러나 그에게도 기적적으로 볕 들 날이 있었으니, 바로 동창인 엘리자베스와의 만남이다. 이 만남으로 그래버와 함께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뀐다. 마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불붙은 촛불처럼, 그래버는 엘리자베스와의 만남을 통해 ‘살아있게’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경험하고 사랑을 하며 결국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사랑을 함으로써, 지옥 같은 곳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연합군의 폭격은 계속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걱정하고 챙겨야 한 다는 점에 있어서는 배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래버에게는 더 이상 폭격도, 러시아 전선도, 전쟁도, 나치도 중요치 않았다. 그가 이러한 것들을 아주 잊고 산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엘리자베스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그것들을 잊고 싶어 했다. 그에게는 절실하게 행복이 주는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겪어온 그래버는 엘리자베스를 만난 뒤 그에게 주어진 꿈같은 3주간의 ‘휴가’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도 비로소 봄이 온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mediaboo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09
“신기해요. 그래도 봄이 온다는 게. 여긴 파괴된 거리이고 봄이 올 이유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도 어디선가 제비꽃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 339p
소설에서는 그래버가 자연경치에 매료되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이는 여느 때나 펼쳐져있는 자연의 미(美)적 요소를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부정적인 배경 안에서 대비함으로 역설(力說)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차별적인 폭격과 수많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고고히 흐르는 자연의 풍광은 그래버의 심리적인 시선을 은유하고 있기도 하다. 자연경치는 그야말로 소소하고 당연한 것들이다. 항상 ‘소소한’것으로 여겨지는 이 행복들은 다른 행복과 다르게 드러나는 사실과 상관없이 우리가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가장 불행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우리에게 견뎌낼 힘을 준다. 그것이 작은 힘이든 큰 힘이든, 그것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며 그친다면 우리는 결국 불행 앞에 무릎을 꿇고 절망하며 행복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우리의 그래버와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엘리자베스와의 꿈같던 휴가가 끝나고 러시아 전선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것은 일상으로 굳어버린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죽음이었다. 그는 또다시 절망해야 했다.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계속 엘리자베스를 그리워해야 했고, 편안한 침대 위의 잠자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그것을 그리워해야 했다. 전선에서의 끝없는 전쟁만이 그를 반겨주는 상황은 이전보다도 더욱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 스스로가 전쟁이 이전에 있던 모든 행복들을 앗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아침에 창문으로 뻗어오는 햇살이 그리웠다. 살짝 그을린 토스트의 향이 그리웠고, 어머니의 웃음이 그리웠다.
휴가 직후 그래버의 모습은 그의 행복에 대한 갈증이 엘리자베스를 만나기 이전의 익숙했던 것, 또 단순하고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먼 과거 일상의 것들로 하향되어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소소한 행복조차 그래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전쟁 통에서 행복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행복을 원했고 찾았던 것 같다. 덕분에 그것이 그를 아직까지 살아있게 했고,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러한 소소한 행복들은 전쟁 이전에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다만 그가 그러한 행복들로부터 무감각해져 있었을 뿐.
우리는 이처럼 소소한 행복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것들에도 감사할 줄 아는 것.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것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불행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는 용기이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행복해질 수 있음’의 가능태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말 못 할 불행들이 수없이 닥쳐와도 끝끝내 살아있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그 명백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자격이 이미 모두 갖춰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실 행복의 가치는 그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크기와 상관없이 얼마나 그 행복을 영위하고 사랑할 줄 아느냐가 그가 누리는 행복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행복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인 ‘삶’ 안에서, 우리는 가장 작은 행복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밝게 빛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닫는다.
한 편의 흑백 영화 같았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는 주인공 그래버의 죽음과 함께 그의 유언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그래버 자신이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작은 행복을 죽음의 순간에서야 발견하게 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가 왜 손에 잡히지 않는 ‘밤하늘의 별’을 동경하기보다 눈앞의 ‘작은 꽃’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구절이다.
‘갑자기 눈앞에 풀이 보였다. 밟혀서 반쯤 짓이겨진, 불그스레한 꽃망울과 이파리가 달린 식물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 535p
동떨어져 있는 밤하늘의 별보다도, 작은 꽃은 여전히 우리의 발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 참고 도서
:Erich Maria Remarque, 1966, 장희창, 민음사,『사랑할 때와 죽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