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캐한 연기와 함께 순간을 타오르다 -
한산한 주점에서는 장작타는 냄새가 싸구려 맥주 향과 섞인 내음새가 진동했다. 바깥에는 눈이 나리고 있었고, 주점안의 난로에서는 가만가만 불길이 일었다. 씻어낸 컵의 물기를 닦던 주점의 주인은 크리스마스만 되면 찾아오는 한 손님이 영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손님 없는 주점이라지만, 사연이 많아 보이는 손님을 마냥 술만 퍼먹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가 아니던가? 하지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려던 찰나, 홀로 온 손님의 파이프에 불이 붙었다. ‘칙’하는 마찰음과 함께 성냥대가리가 으깨지며 손님의 콧수염이 환히 빛났다. 희끗한 털이 섞인 콧수염은 그가 나이가 지긋한 신사임을 말해주었다.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
방금 전까지 진동하던 맥주냄새가 가시고, 버지니아 산의 담뱃잎 탄내가 주점을 뿌옇게 메웠다.
“들어드리지요.”
“맥주 한 병만 더 가져와주면.”
주인은 뒤돌아서서 맥주를 꺼내 손님 앞에 놓았다. 손님은 기다렸다는 듯 맥주병을 째로 들이키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도 크리스마스였지. 내가 한창 젊었을 때, 막 스무 살을 넘긴 새파란 놈이었을 때야. 우리 아버지는 성냥 공장을 하고 계셨고, 공장이 잘되는 바람에 우리 집은 항상 부유했어. 쓰고 또 써도 돈이 남았지. 그때 크리스마스 밤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어. 다들 크리스마스라고 이웃을 찾아다니거나, 놀러다니려고 말이야. 물론 내 상상이지. 사실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노동자들이 절반이상이었으니까.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어.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친구놈과 함께 한 주점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진탕 마셨지. 예수의 성탄을 나름대로 축하하면서 말이야.
진탕마시고 난 뒤에 헤롱헤롱 해질 때 쯤에서야 나는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오늘을 위해 똘똘말아놓았던 궐련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지. 그러다 불을 붙이려던 순간, 옆 가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고있는 아이가 보였어. 여자아이였지. 거리가 좁아터진데다, 크리스마스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소녀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지. 그 모습이 안쓰럽더라고.
그런데...나는 딱히 나서거나 그러질 못했어. 그 소녀를, 그 간절한 소녀의 목소리를 한편의 흑백영화처럼...보고 있게 되더라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말이야.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추위로 벌게진 콧잔등 아래에서 조그맣게 움직이는 입술. 그리고 그...“성냥사세요” 하는, 그 단말마의 비명 같던 부탁이 말이야.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어. 끊임없이. 어찌나 많이 내리던지 소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어. 다 낡아빠져 서툴게 기워입은 누더기 옷과, 꼴에 모자라고 뒤집어쓴 헝겊위에도 언제부턴가 눈이 소복히 쌓여있었지.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어. 내 이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한거지. 궐련을 입에 문채로, 나는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어.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아이가 나를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 그 추위속에서도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아야한다는 정신만은 붙들고 있던거야. 소녀가 내게 잰걸음으로 다가와 말했어.
“성냥사세요”
그제서야 녀석의 발이 보이더군. 녀석은 제대로 된 양말조차 신고 있지 않았어. 소녀가 신기에는 너무 큰 가죽신이었지. 심지어 소녀의 발은 새파랗게 질려있었어. 동상이었던 거야. 언제부터 이곳에 나와 성냥을 팔기 시작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난 소녀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으로 보였어. 점차 그렇게 보이더라고.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파리하게 떨리는 소녀의 손에 들린 작은 성냥갑하나가 나타났어. 내리는 눈을 맞아 축축히 젖어버린, ‘쓸모없는’ 성냥이었지.
“성냥사세요”
이전보다 다급해진 목소리가 나를 죄여왔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추위 때문인가? 할 말을 찾지 못해 굳어버린 입술이 원통할 따름이었어.
집이 어디일까? 부모님은 계시나? 이름은 뭐지? 수많은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고, 그사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성냥갑하나를 받아들었어.
그런데 그 성냥갑에 뭐가 쓰여있었는 줄 알아? 우리 아버지의 공장상표였어.
「삶에 불을 붙이다. ‘웰 라이프’ 성냥!」
파란색 성냥갑에 휘갈겨 쓰여진 상표. 나는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봤어. 내가 누구인지 그 소녀는 몰랐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지. 아버지의 공장에는 어린아이들도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하고, 병을 얻든 사고를 당하든 공장에서 해고되는 아이들도 많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집히는 모든 것들을 소녀의 성냥바구니에 넣었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얼마였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적어도 그 성냥들을 전부 살 수 있는 돈이었겠지.
“이름이 뭐니?”
드디어 내 입이 떨어졌어. 소녀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어.
“저는 성냥이에요.”
사실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그냥...나라도, 나만이라도 그 소녀를 알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아. 그런데 '성냥'이라는 별 뚱딴지 같은 대답이 나오는게 아닌가?
나는 아무말 없이 서있다가 이내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어들었어. 옛날에 아버지께 받은 선물이었지만,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속죄의 의미였을까? 소녀의 얼음 같은 발에 비록 신던것이지만 양말을 신겨주고 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군.
"감사해요."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어.
"정말 감사해요."
내가 먼저 돌아섰을까? 소녀가 먼저 돌아섰을까? 나는 소녀와 헤어진후 입에 물고있어 축축해진 궐련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꺼내들었어. 여전히 희망차기만 한 상표가 눈에 띄었지.「삶에 불을 붙이다. ‘웰 라이프’ 성냥!」성냥갑은 축축했지만, 성냥에는 의외로 불이 잘붙더군. 웃음이 나왔어. 걱정과 다르게 불이 잘붙어서일까? 문득 나에게 자신을 성냥이라고 소개하고 떠나간 소녀가 어렴풋이 떠올랐어. 방금 전에 만났지만, 벌써 먼 과거로 사라진 사람처럼...
"멋진 이야기군요."
표정이 썩좋아보이진 않는 주점주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반응과 상관없이, 손님은 계속해서 이야기 했다.
"그 소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건 다음날이었지."
손님은 애꿎은 파이프를 물고 한참을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소녀의 말이 이해가 가더군. 자신을 성냥이라고 소개한 그 소녀를 말이야."
손님은 파이프를 물고 난로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소녀를 만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주점주인은 그런 그를 곧이 곧대로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왔고, 집에는 트리를 잔뜩 꾸며놓고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이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성냥이었던 게야. 그 소녀 처럼."
손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는 피곤해보였다.
"타없어지기 위해 태어난 성냥은 오늘도 매캐한 연기와 함께 그 순간을 타오른다네. 소녀는 그걸 알고 있던게야. 자신이 타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이 자신에게 머지않았다는 것도."
이제 손님에서 신사로 살아가기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는 여전히 파이프를 문채로 주머니를 뒤져 테이블위에 돈을 집히는대로 올려놓았다.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찰나의 순간에 빛나는 것이 성냥이지. 아무렴, 그 찰나의 순간만이라도 빛나고 싶어하는 것이 말이야."
주점 주인은 말없이 신사의 가방을 직접 들려주었다. 그의 퇴장이 빠르면 빠를 수록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축축한 성냥갑...하지만 그 안에도 타오르고 싶어하는 성냥이 있었어."
"취하셨어요. 어서 들어가시죠."
"결국 쓸모없는 성냥은 없었던거야...아무리 보잘것 없더라도...결국 모두 불이 붙을수 있었던거야..."
"아무렴, 그렇지요."
취한 손님을 가게문으로 이끌며, 주인은 마음에도 없는 맞장구를 계속해서 쳐주었다.
"가는 길 조심하시오."
주인은 등을 돌려 떠나는 마지막 손님을 향해 모자인사를 해보였다. 그에게는 이제부터가 크리스마스였다. 잠들기전까지 얼마 남지않은 시간이지만, 서너 시간이나마 가족들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는 놓칠수 없는 것이었다. 아내가 해놓았을 성탄요리가 남았으려나, 주인은 테이블을 대충 닦는것으로 마감을 끝내고 가게문을 닫았다.
코펜하겐의 크리스마스가 깊어가고, 하루가 저물어갔다. 타없어진 태양을 대신하여, 누군가의 성냥이 가만히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