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진 Jun 12. 2020

그냥 좋아서!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

몇 년 전에 한 지역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특강을 간 적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책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편집자가 하는 일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역시 초등학생 강의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법... 나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편집자’라는 직업보다 ‘책’에 더 초점을 맞춰서 설명해보기로 했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아이들에게 괄호에 들어갈 말을 물어보았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① (    )을 읽는 사람

② (    )을 쓰는 사람

③ ( )을 만드는 사람

④ (    )을 안 읽는 사람


“책이요.”

아이들은 1초도 망설임 없이 씩씩하게 정답을 말했다. 나는 또 물었다.

“그럼 이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읽기만 하겠다는 친구, 읽고 쓰겠다는 친구, 만들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날 강의는 그렇게 1, 2, 3, 4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잘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만들기였다!

강의를 의뢰한 곳에서 초등 아이들이라 만들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아, 만들기...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하는 게 만들기인데. 이것 또한 며칠 고민을 하다가 다이소 서너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요. 책 모양 상자 있어요? 에? 있어요? 몇 개나 있어요?”

그렇게 어렵게 구한 책 모양 상자를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내가 책을 만들면서 작가들을 만나 보니까 그분들은 다 좋아하는 것을 쓰더라고요. 역사를 좋아하면 역사책을, 게임을 좋아하면 게임책을, 동물을 좋아하면 동물책을 써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동화를 쓰고요. 미래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표현하는 사람들이 인재가 돼요. 그래서 지금보다 책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예요. 자, 여러분도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이야기해보고 책을 만들어 볼까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각자 쓰고 싶은 책을 만들어 보았다.  


『비투비의 모든 것』, 『인형 키우기』, 『미니어처 요리 레시피』, 『모든 종류의 동물』, 『마술의 상식』, 『야구의 모든 것』, 『BMW의 발전 과정』, 『네이말 따라하기』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로 갈 것도 없이, 최근 출판계에는 첫 책을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다. 첫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좋은 결과도 꽤 많이 나온다. 책이 처음일 뿐이지 그들의 내공과 경험은 기존 작가들과 다를 게 없다. 어디에서 그렇게 잘 쓰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다 보니 내 주변에도 글이나 책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고, 그들의 지인의 지인까지 종종 자문을 구해온다. 그래서 이야기를 해보면 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기는 분도 있고, 꼭 책을 내고 싶다는 분, 어떤 주제에 완전 몰입해 있는 분들도 있다. 질문은 여러 가지 다양한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이 주제(또는 이 글이)가 책이 될 수 있을까요?” 또는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이다. 둘 다 간단히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과 꽤 긴 통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분들 중에 한 가지에 깊이 몰입해 있거나 몰입했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의 질문은 다르다. 아니 질문도 별로 없다.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나 속내를 드러낸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목소리만 들어도, 아 이분은 책이나 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에 굉장히 빠져 있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 대화가 더 재밌어진다.

어쩌다 출판이나 집필 관련 강의를 나가면 처음에 이런 질문을 가볍게 던져본다.


“쓰고 싶다는 여러분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일까요?”  

① 나는 쓰는 게 마냥 좋다.

②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③ 나 혼자 읽고 싶다.

④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⑤ 책을 출간하고 싶다.

⑥ 00(관심 대상)이 좋아서 쓰고 싶다


초중고, 성인을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2번이다. 1, 3, 4, 5번은 비슷한 비율로 나오는데 강의 주제나 참석자들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가장 적게 나오는 것이 6번이다. 10명 중에 한두 명이 고르는 정도이다. 그런 다음 “6번을 고르신 분이 책을 쓸 확률이 가장 큽니다.”라고 말하면 출간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실망스러운 얼굴을 해서 좀 미안할 때도 있다.

나는 지식이나 필력을 뽐내거나 남들 앞에 서기 위한 ‘말과 글’이 아닌, 그저 좋아하는 대상을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함을 목표로 할 때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언어가 태어난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우리가 책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쓰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냥 좋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의외의 슬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