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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Nov 03. 2018

07 그 사람과 그의 글이 다름을 견디는 법

당신의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


07

고등학교 때 유독 좋아했던 작가가 있었다. 그의 책들은 언제나 책장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한창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때라 교육 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과 말이 죄다 멋져 보였던 때다. 그런데 세상에! 대학생이 되어 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그고 그의 책을 찢어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날 나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선배를 따라 그 작가를 만났다. 같이 밥을 먹는 자리였는데, 간간히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는 내가 (글로) 알았던 000작가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독자를 그렇게 대하다니…. 나는 너무도 화가 나 어찌할 줄을 몰랐다. 피 끓은 21살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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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다양한 각도로 충분이 이해해 볼 수도 있었다. 우선 그는 작가 000이기 전에 인간 000이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 수도 있고, 모 출판사에서 인세를 떼어먹혔거나 자신을 험담하는 소문에 기력에 쇠한 상태였을지도 몰랐다. 성격이 원래 무뚝뚝한 사람일 수도 있고.


어찌 되었든 그 사건이 약이 되었는지, 나는 그 뒤로 어떤 사람의 ‘글’이 그의 말과 행동과 달라도 놀라지 않는 성숙한(?) 교양인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이 일치하지 않을 때 대단히 실망한다. 글 쓰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잣대가 커피나 장난감을 만드는 사람의 정신이나 태도에 들이미는 잣대보다 혹독한 것도 사실이다. 글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래도 그 간극이 더 멀어지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글은 한 번 쓰면 고정된 박제(재판을 찍거나, e-book에 수시로 수정이 가능해도, 1쇄를 가진 독자의 책은 수정이 불가능하다. 또한 도서관과 서점 창고에 있는 책의 내용도 바꿀 수 없다.)가 되지만 사람은 변화무쌍한 동물이라, 그 둘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본성이야 그대로겠지만 주변 상황이나 여건이 바뀌면 우리는 이전의 나가 아닐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과 그것을 쓴 사람의 간극은 시간이 지나면서 벌어질 수밖에 없고, 독자들은 적잖이 실망하여 그 사람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겠노라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작가를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는 독자들도 이러한데, 편집자는 어떨까? 가까이에서 사람 000을 지켜보며, 그가 써내려가는 ‘글’이 그 사람과 지나치게 다를 때 편집자들은 사실 힘들고 괴롭다. 솔직한 심정이다. 이 욕망은 어떤 것일까?


독자는 모든 ‘글’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글과 사람이 일치되기를 원한다. 그 글의 첫 번째 독자인 편집자도 작가와 그가 쓴 글의 간극이 너무 크게 벌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 둘이 일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며, 첫 번째 독자로서의 태도로도 온당치 않다. 다만 최소한의 차이를 바랄 뿐이다.

단, 편집자는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쓰기의 거룩함’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모종의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글’을 쓰는 사람은 바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맛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쓰고 싶어 하며, 쓰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중에 가장 반듯한 것을 꺼내 든다는 것을...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 또한 편집자가 책을 만들며 세상을 배우는 방식이다. 글쓰는 자가 작가 000만이 아닌, 인간 000이란 것도 함께 인식하는 순간, 편집이라는 일을 통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몸에 익혀가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요? 훌륭합니다. 편집자가 될 소질이 다분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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