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던 말
3년 만에 만나러 가는 길에 설레기도 하고 어떤 말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머릿속에 여러 이야기를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 다니던 회사에서 배우고 싶던 선임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그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보다 떨리고 설레었다.
10년 전쯤 교수님 회사에서 만나 함께 프로젝트를 하며 선임님께 많은 것을 배웠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디자인 방법론인데, 나에게 디자인 방법론은 디자인이라는 망망대해에 나침판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은 나에게 단순히 예뻐서, 눈에 보기 좋아서 하는 디자인은 무엇인가 텅 빈 느낌이었다.
좋은 디자인, 완성도 높은 디자인은 어떤 방향을 갖고 해야 할지 가끔은 막막할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선임님과 처음 함께 작업한 프로젝트는 장소 브랜딩 포지셔닝, 네이밍에 대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설득을 위한 자료를 만드는 것이 아닌 전 세계의 해당 브랜드와 동종 업계/유사 업계 등 많은 사례들을 일정한 기준을 세워서 분석을 한 뒤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고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를 정립해 나갔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래픽 모티프로 연결하여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디자인으로 풀어내었다.
이 프로젝트를 생각하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에 밑그림부터 색감을 어떻게 입혀야 하는지 하나하나 배워갔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결과물은 지금도 많은 시민이 찾는 유명한 장소 브랜드가 되어있다.
이때 선임님은 원더우먼 같은 분이셨던 것 같다.
회사 일은 물론이고, 때론 학부생들 강의도 하시면서 가끔은 논문과 책도 쓰시는 걸 보면 일 년을 마치 십 년처럼 보내시는 분 같았다.
하지만 겉모습은 작고 마른 몸에 굉장히 차분하시며, 내가 고민상담을 요청하면 언제나 따뜻하게 귀 기울여주시는 분이셨다.
(사실 나보다 10살이나 넘는 나이 차이여서 그런지 선임님이라기보다 선생님, 교수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때부터일까 선임님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고 너무나도 배우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선임님처럼 될 수 있을까? 공부를 더하면 가능한 걸까?’
이런 생각에 선임님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면 ‘조금 더 실무를 해보고 늦지 않는다’는 답을 주시곤 하셨다.
그 뒤로 10년이 흘렀고 ‘이제는 정말 공부를 더 해봐도 될까?’ 다시 한번 더 물으러 선임님께 가던 길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났지만 한두 달 전에 만난 인연처럼 옛날 함께 일했던 추억들과 지인들 소식을 주고받으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표현할 수 없었던 ‘배우고 싶은 분’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전달하며, 브랜드라는 세계에 여태 경험해 온 것들에 만족하지 못한 갈증을 이야기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도 덧붙여 풀어냈다.
결론은 이번에도 ‘아직은 이르다’라는 답변이셨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10년 전 내 또래셨던 선임님의 경험을 토대로 그때의 목표와 현재의 아쉬웠던 점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여러 해 동안 내리지 못했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훗날에도 이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날의 대화 중에서 깨달았던 것이 있는데,
선임님과 나는 서로 브랜드를 보는 관점이 같은 것과 프로젝트에 큰 그림을 그려주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가장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던 말을 들었는데
“그동안 멋지게 성장하셨네요! 언제 저랑 일해볼래요?”라는 것이었다.
사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 또한 언젠가 다시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바랬고, 항상 배우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선임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이 날 나는 ‘정말로 브랜드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어떠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훗날 선임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료가 되려면 더욱 나를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