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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님 May 07. 2024

요술공주를 기리며

양파 '요술공주' - 1999년  6월 26일 발매된 3집

40이 넘은 지도 3년이 지났다.


어린 시절에 나중에 어른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라고 생각했을 때 내가 생각하던 어른의 나이는 20대 중순, 많이 생각해야 30세였던 것 같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이 40대


그렇다고 39세의 연말에 특별히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바쁜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었다.


어디엔가 설문에 응했을 때 40대에 체크해야 했던 그 순간에야 내가 40이 되었구나 체감했던 것이다.


나의 마음은 20대 초반의 한창 발랄했던 때랑 별반 다를 게 없는데 꿈속에서 신선이랑 바둑을 두고 온 걸까 10년쯤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언제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중년이 된 건지....





43살이 된 2022년 벚꽃이 피기 시작하던 때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한 대학 동창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성량이 크고 가창력이 뛰어나 밴드의 보컬을 맡았던 친구였다.


그래 우리가 큰 병이 걸릴 수 있는 나이지....


갑자기  너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친구들 부모님의 부고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고  엄마 아빠의 건강이 먼저 무너지고 있었기에 40대는 참 슬픈 나이구나 생각했지 내가 떠날 수도 있다는 건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데 20여 년을 연락하지 않았던 대학 동기의 와병 소식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강렬하게
깨달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다는 걸


하루 종일 그 애가 불렀던 노래가 생각이 나고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도 얘기하고 싶었다. 너의 노래는 정말 신났어. 에너지 넘치던 무대가 그립다. 하지만 아프다는 소식 듣고 갑자기 연락하는 게 맞는 건지, 그 애도 당황할 것 같아 소식을 전해 준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연락처만 저장해 두었다.


"다음에 만날 때 나도 불러!"


다음에... 먼저 얼굴부터 보고 그러고 연락하지 뭐....


하지만 다음은 없었다.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준 친구가 부고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연락을 해볼걸.. 아직도 양파의 '요술공주'라는
노래를 들으면 네가 생각난다고.  그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뛰어다녔던 너는 너무 멋있었다고...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너무 슬펐다.


남편이 퇴근하면 나 혼자라도 장례식장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도 없겠지만 벚꽃 피던 봄에 격려의 말을 건네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서... 꼭 가고 싶었다.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이 넘는 길 끝에 도착한 대학병원 장례식장.  흰 국화에 둘러싸인 영정 사진 속 
20살 때와 똑같은 미소에 반가워해야 할지 원통해야 할지.... 그저 눈물이 났다.


친구의 언니가 조심히 어디에서 오셨는지 물으셨다. 나는 20년 이상 연락 안 했는데 우연히 듣고 오게 되었고 대학교 같은 동아리 친구였다고 말씀드리다가 봄에 친구에게 못했던 말들이 같이 튀어나왔다.  
아직도 양파의 '요술공주'가 가끔 생각나는데 그때 그 무대가 너무 에너지 넘치고 좋아서 생각나면 찾아 듣는다고... 자우림 노래도 너무너무 잘 불렀었고 동아리 궂은일에도 먼저 나서서 야무지게 했던 친구였다고...  란했던 그 애의 그 시간을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눈물 흘리며 듣던 친구의 언니가 집에서도 첫째 딸인 나보다 더 집안 대소사를 잘 챙겼던 동생이었다면서
떠날 때도 가족 모두를 챙기고 충분히 인사 후에 떠났다고 말해주셨다.


서로의 소식도 거의 모른 채 살았던 세월이었지만 서로 가장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던 1999년을
매일 만나 놀았던 친구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 나의 20살이 함께 떠난 거 같아 너무너무 허전했다.




너는 알고 있을까 너에게 인사하러 가는 길 너와 지냈던 그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노래를 부르는 외에도 엄마처럼 동기, 후배를 챙겼던 너의 20살.

나는 그냥 밴드음악이 좋아서 가입했을 뿐 딱히 잘하는 것도 없었고 동아리 일에 열심히 한 적도 없어서

동아리 창립기념행사를 한다고 졸업한 선배님들을 부르고 고사를 지냈을 때 이리저리 뛰던 너를 많이
돕지도 않았어. 누가 사 왔는지도 모르는 만지기도 징그러웠던 돼지머리. 너는 혼자 그 큰 것을 다 잘라

이리저리 술안주로 내놓았다. 돼지 귀, 코 처음 만져봤다고 손을 닦아도 닦아도 기름지다며 호탕하게 웃고
소주 한 잔 마시던 모습.

너의 졸업작품 연주회에 가서 네가 작곡한 곡을 들으며 이런 면도 있었네 했었는데....


 나 함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너의 장례식장에 혼자 가서 잠시 인사만 하고 집으로 가는 길

너에게 한 마지막 인사인지 우리가 함께 했던 1999년을 보내는 시간이었는지

나는 그저 혼자서 계속 우리를 생각했다.

나를 기억해 줘요....

나를 기억해 줘요....



1999년 어설펐던 우리의 공연을 떠올리며,

먼저 간 네 아이의 엄마였던 친구를 생각하며 양파의 요술공주를 듣는다.


친구가 남긴 네 명의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불었던 엄마를 꿈에서라도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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