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만 1년 기념

어쩌다 수험생

by 길치

며칠 후, 6월 30일이 되면 백수가 된 지 만 1년이 된다. 출근은 5월부터 하지 않았지만 6월 말까지 급여를 받았으니 경제활동 여부로 보면 딱 1년이다. '백수'란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행정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공부한 지 6개월이 되어 가니 집중력이 확 떨어져 강의가 귀 언저리에서 흩어지기만 한다. 공부도 안 되고 40대 중반 싱글맘, 가장으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기록해 본다.



돈 안 벌고 먹고살기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 한참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원래 계획은 힘든 상황이 좀 정리되면 다시 취업하여 디자이너로서 마지막 커리어를 쌓는 것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파이어족처럼 살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평생 살 준비는 안 되었기에 임시로 파이어족 체험 중이라고 하자.


검소함과 거리가 아주 멀지만, 그렇다고 또 사치스럽지는 않기에 돈을 벌지 않고도 잘 버티고 있는 중이다. 주식투자를 시작한 지 7-8년쯤 된 것 같은데 이제야 좀 감이 와서 조금씩 수익을 내며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도 살고 있다. 처음에 주식을 시작했을 때는 초짜의 팔랑귀 모드로 남들이 벌었단 종목을 무지성으로 사버리고 뚝뚝 떨어지는 파란불에 가슴이 철렁대곤 했는데 지금은 탄탄한 종목들을 묵혀 놓고 시간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작년 초에 잠시 관심 가졌던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은 잘한 것 같다. 열심히 배우다 나는 갭투자를 할 깜냥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모를 잔금리스크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돈으로 인해 쫄리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았다. 집값이 다시 치솟고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동안 모아 놓은 돈과 소소한 투자 수익으로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는 것일 뿐 다시 일은 해야 한다. 내가 집에 없어도 맘 편하게 외부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언제든 일을 다시 할 생각이다.


어쩌다 수험생

1년 간 버틸 수 있었던 건 돈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계속 공부를 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힘들다고 느꼈던 감정은, 내가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에 느끼는 무력감이었다. 공부만큼은 내가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왔고,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그 과정에서 효능감을 주어 담으며 나를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작년에 우연히 시작한 공인중개사 시험을 운 좋게 단기간에 합격하고, 공인중개사를 해볼까 했었지만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나중에 행정사사무소를 같이 개업하기 위해 행정사 준비를 하고 있다.


5월 말에 1차 시험을 보았고, 결과는 만족스러운 점수로 합격 예정이다. 지금은 2차 준비를 하고 있는데 논술시험이라 그런지 만만치 않다. 최대한 노력해 볼 테지만 안 되면 내년까지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먹고 준비하고 있다. 지하 캠핑창고 겸 휴식장소였던 나의 아지트는 독서실이 되어 버렸다.


힘든 상황은 늘 현재진행형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이가 커서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지원해 줄 수 있도록, 나중에 독거노인이 되어도 돈에 쪼들리지 않도록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일을 해야 한다. IT 업계의 1년의 공백은 꽤 크기에 이전에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얼른 새로운 길을 닦아야 한다. 공부해 보니 행정사 일도 꽤 재밌을 것 같다.


희망

가장 바라는 것은 가족의 행복과 안정임은 당연하고, 그 외 올해 시험에 붙어 내년에 사무소를 개업하고 싶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이 클 테니 우선 내년까지 시험 준비하는 것으로 마음의 여유를 두었지만, 그래도 올해 안에 꼭 끝내고 싶다. 그러려면 정말 집중해서 네 과목을 달달 외워야 한다. 원래도 잡생각이 많은데 나이까지 먹어버리니 더 집중하기 힘들지만, '꾸역꾸역'의 힘을 믿고 해보려 한다.


학원의 합격자 인터뷰 영상에서 합격까지 가게 된 나만의 키워드 등을 한 마디씩 하는 것을 보았다. 나도 꼭 합격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 (인터뷰는 안 할 것이지만)


제 합격의 키워드는 '꾸역꾸역'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에서 디자이너들의 작업물을 컨펌하고, 회의를 이끌고, 결과를 인정받으며 나름 활발한 사회생활을 했던 때가 그립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집에서 가장 편한 옷을 입고, 하루 종일 모니터와 책만 바라보고 있으며 그 외의 시간엔 아이와 강아지, 고양이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는 내가 가끔은 낯설다. 그러나 이렇게 가족을 가까이 챙기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됨에 늘 감사한다. 이마저도 힘든 상황이 더 많을 테니 말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백수 만 2년 기념'의 글은 남기지 않길 바라며...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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