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격조했습죠냥
“자, 이제 팀장으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지목하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여섯 명의 손가락 중 다섯 개가 나를 향했다.
남은 한 개는 물론 내 손가락이었다.
그렇다.
회사에서는 말수 적고 샤이한 체리보이였던 내가,
이세카이(=경주연수원)에서는 팀장이 되고 말았다.
환생도, 예토전생도 없었는데 팀장이라니.
사실 계기는 단순했다.
교육 시작 전에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이것저것 먼저 말을 걸었던 것.
덩치가 좀 있는 것도 한몫했을 거다.
“저 정도면 짬 때려도 괜찮겠다”
하는 가벼운 심리가 아니었을까.
괜히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릴 적부터 가진 내 핸디캡.
슈퍼 울트라 디럭스 대문자 I인 내가
팀을 조율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다 보면 종종 조장이나 팀장을 맡게 된다.
특히 추천제로 뽑히는 구조일 경우엔 더욱더.
어질어질하다.
문득, 먼저 연수원을 다녀온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팀장은 절대 하지 마. 발표만 오지게 하고 똥만 치우다 온다.”
젠장. 이럴 거면 반장이나 해서 가산점이나 더 받지.
제일 귀찮은 걸 맡고 말았다.
*
선배의 말은 정확했다.
데면데면한 조원들을 붙잡고,
하루 종일 마이크 붙잡고 발표하는 신세.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소리는 삑사리가 났다.
게다가 하루 여덟 시간 꽉꽉 채운 스파르타식 수업.
끝없는 조별 토론, 조별 과제, 조별 발표.
팀원들의 눈빛은 점점 텅 비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결과물을 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참고로 우리 팀원의 MBTI는 이랬다.
INFJ - 나(밍당), 39세, 남.
ESFJ - 서기이자 울 1반 반장. 35세, 남.
ISFJ - 총무, 44세, 여.
ISTJ - 아기총무, 32세, 남.
ISTP - 서기보조, 30세, 여.
Unknown - 아마 INTP, MC(진행), 45세, 남.
6명 중 5명이 I.
쉬는 시간에도 조용조용, 수업 때도 수줍수줍.
다른 팀에 비해 현저히 조용했다.
괜히 팀장인 내가 못해서 그런 건가 싶어,
쉬는 시간마다 일부러 말을 걸었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데, 팀장이니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영혼을 갈아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도 다들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임해줬다.
대문자 I들의 최선이라 다른 팀 눈에 어떻게 보였을진 모르겠다.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도 잘 아니까,
으쌰으쌰 최선을 다 했다.
*
시간은 흘러 3일 차 마지막 수업.
열여섯 번째 발표를 끝내니, 이제는 웬만큼 떨리지도 않았다.
나쁜 경험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커리큘럼.
1, 2반 47명이 강당에 모여 조별 과제를 전시하고
최고의 팀을 뽑는 시간.
결과는,
1반은 우리 4팀이 뽑혔다!
두둥.
치열한 경합이 있었던 2반과는 다르게
압도적인 1등이었다고 교수님이 말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작은 가습기도 상품으로 받았다.
캠핑 갈 때 써먹으면 되겠다.
물론 마지막 날 시험은 거하게 말아먹은 것 같지만,
그건 연휴 끝날 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나의 이세카이(경주) 팀장 생활은
뜻밖의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안녕하세요, 밍당.e입니다.
브런치를 정확히 20일 동안 손 놓고 지냈습니다.
방금 인사드릴 때 닉네임을 다른 걸 쓸 뻔했을 정도로,
브런치를 손에서 놓고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마침 마지막으로 남겨둔 글이
“그런 날이 있다”라는 찡찡글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무슨 일 있냐고
안부를 물어보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별일 없었습니다.
아주아주 롱롱한 추석 연휴를 즐기기 위해서 기도 했고,
연휴 직전 주에 승진에 필수인 연수를 잡은 것도
브런치를 로그아웃 해놓고 폐관수련을 하게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승진 고시가 있는 회사입니다.
얼마나 전근대적이냐 하면,
다른 은행권에서는 옛적에 사라진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꾸역꾸역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는 우리 회사.
몇 세대 위의 고참들은 반년 가까이 회사와 독서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코 박고 공부만 했다 하고,
시대가 바뀐 지금도 연수, 시험 점수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그런 이상한 곳이에요.
어쨌거나 매우매우 오래간만에 글을 적으려니 무엇을 써야 할까 망설였는데,
며칠 전 다녀온 연수원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 제목도 요즘 유행하는 이세카이물로 뽑아보았습니다.
다들 잘 지내셨죠?
앞으로는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긴 긴 연휴 건강하게,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