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살아가기
아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평일에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부산 종일을 운전하고 컨테이너 승하차 시간에 맞춰 좁은 차에서 쪽잠을 자기 일쑤다. 주말에는 평일 동안 함께 고생한 차를 정비하고 넓은 텃밭을 가꾼다. 기어코 여름 땡볕에서도 고추를 따고 잡초를 뽑고 세차를 한다. 아빠의 노력 덕분에 올해도 우리 가족은 삼시 세끼 고기반찬에 기름값과 전기세 걱정 없이 혹독한 겨울과 여름을 편히 보낼 수 있다. 더없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주말은 쉬시라 잔소리와 걱정을 늘여 놓지만 소용없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 책임을 오롯이 아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 부담을 덜기 위해 엄마는 취업을 했고, 나는 조금 늦지만 3년 전 완전한 독립을 했다. 완전한 독립이라 함은 경제적 독립이 온전히 구축되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말이다. 남동생 또한 큰 말썽 없이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유별나지 않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으며 건강하다.
매주 주말 집안 대청소는 내가 맡아서 한다. 청소와 정리는 우리 가족 중 내가 제일 빠르고 잘하기 때문에 누가 하던 마지막엔 꼭 내 손길을 거쳐야 마무리가 된다. 집안과 밖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다 보니 바닥은 지푸라기와 흙과 털로 엉망이다.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구석에 자리 잡은 먼지를 닦아냈다. 엄마는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아빠는 여전히 텃밭에서 마늘밭에 자란 잡초를 뽑고 있다. 동생은 고양이 화장실에 쌓인 ‘감자와 맛동산(집사라면 알 수 있는 용어)’을 치운다.
서론이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어느 순간 깊은 곳 어딘가에 의구심의 물감이 퍼지고 있었다. 당연하게 해왔으니 의구심을 헤아리기 전에 상대방의 요구에 찝찝하지만 응해줘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의구심이 든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것’에 유독 예민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데 아빠의 ‘당연한 부탁’이 그러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아빠의 관계가 틀어져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나에게 글쓰기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을 때 혹은 갈등, 불안, 우울 등의 감정이 해소가 되었을 때 쓴다. 이번 글은 후자에 가깝다. 이상하게도 자연스러운 행동을 했을 뿐인데 무언가에 걸려 멈춰지거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찝찝함을 억지로 수면 위로 올려야 했다.
다시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딸아, 물 좀 줄래?’
‘아들아, 커피 좀 타 줄래?’
그리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은 엄마 혹은 나의 몫이다.
엊그제만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물 달라니 물을 줬고, 커피를 타 달라고 해서 커피를 타 줬고, 지저분한 게 싫어서 밥상을 먼저 치웠다. 그 당연한 순리가 계기도 없이 균열이 생겼다. 밥을 먹다 말고 물을 뜨려고 엉덩이 떼자 갑자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당연한 행동에 의구심이 들었을 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시킨 일도 아니다. 만약 ‘아빠가 먹고 싶으면 아빠가 떠서 먹어!’라고 이야기했다면 아빠가 직접 물을 떠 마셨을 거고 서운해하지도 않았을 거다. 은연중에 아빠는 돈을 벌어오니 집안일에는 완전히 배제해야한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었던 것일까. ‘아하!’의 순간이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커서 당연히 해왔던 걸까? 아님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남들이 보기에 프리 해 보인다는 우리 가족에게도 뼛속 깊이 스며있던 걸까? 두 가지가 적절히 섞여 있었던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물을 떠다 주고, 커피를 타 주고, 어른을 대접해야 한다고 해서 아빠에 대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작은 균열이 생겼을 뿐 나아지기 위한 방법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배려가 전제되는 대화는 건강하다. 우리 가족은 배려의 대화를 많이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더 이상 사랑한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기로 했다. 냉혹한 바깥세상에서 두 발 딛고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안전지대로 여기는 집에서만은 편안하고 위로가 가득해졌으면 한다.
저마다 가족에게도 서로의 역할이 있다. 역할의 무게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그 무게는 한 사람에게 고정적이지 않는 게 좋다. 무게는 서로 나눠가지며 결국 비슷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둔 부부의 무게는 가장 무거울 것이다. 그 무게를 자녀들은 시기의 맞는 역할을 알아차리고 조금씩 나눠가져 준다. 아내는 가정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고 경제적 활동을 영위하며 남편과 분담할 것이고 남편 또한 가정의 무게를 나누기 위해 자녀와 소통하고 집안의 구조를 섬세히 익혀두어야 할 것이다. 각자의 버거움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역할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 더 나아가 나눠갖길 노력한다면 얼마나 건강한 가족일까 생각해본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한 사람의 희생을 보듬어주지 않고 나눠갖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서서히 멀어질 것이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희생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며 한 껏 기울여진 저울과 같은 것이다.
‘아빠, 나 물 좀 줄래?’
‘먹고 난 뒤에 각자 자리는 각자 치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