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니, 억울해졌었다.
[국어사전]
억울 :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아무 잘못이 없는데 잔소리를 듣고,
최선을 다하는데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 이유 없이 죄인이 되고 있었다.
억울했다.
'참으면 되겠지, 언젠가는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하지만 억울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되려 억울함은 마음속에 방 한 칸을 잡고 장기 체류를 하고 있었다. 억울함은 내 일부분이 되었고 이게 대한민국 남자의 default값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이렇게 살지 않아.'라는 일반화로 나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다들 이렇게들 사니까.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훅 들어오는 라이트 펀치는 억울함의 방을 흔들어댔다.
흔들 때마다, 억울함의 방은 '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억울함 해소"라고 검색을 해보니, 6가지 방법이 나온다.
복수하지 않기 : 복수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 그럴 수 없는 관계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기대하기 : 그 사람에게는 아무 기대를 안 했다. 자연스럽게 정말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을 했다. 물론 이것도 또 다른 억울함을 불러왔다.
대화 시 '나' 전달법 사용하기 : "네 행동에 내가 상처를 많이 받았고 이 일을 잊어버리기가 힘들어."라고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공감이 없으면 이런 말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사람들의 실수를 너그럽게 보아 넘기기 : 나는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왜 실수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안해'라는 말을 만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애초부터 '미안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본인도 그러하다고.
긍정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기 : 자연스럽게 내가 조금 실수를 해도 이해해 주는 사람들. 내가 실수하는 삶을 살았어도 지금까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해졌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이 더 중요해졌다. '부부'라는 관계는 사회적 의무감이지 마음의 의무감은 아니니까.
용서하기 : '용서한다'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용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억울함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매일 용서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억울함 해소하려는 노력은 결국 또 다른 억울함을 불러일으키는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는 양면.
밖에 나가서 가족을 흉보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생각했었다. 가끔씩 그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나는 참 불편했기에. 그래서 어디에 털어둘 곳이 없었다. 이야기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내 치부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아 물론 부모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불효라고 생각했다.(나만)
해결될 것도 아닌데 굳이 나가서 내 치부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이 억울함은 해결되지 못하고 내 마음속 한켠에 답답하게 쌓여 있었다.
대나무 숲이 필요했다. 내 억울한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사람.
하지만 그땐 없었다.
억울함 베이스에 성격차이, 가치관차이, 부모님 등 각종 세트가 덮이다 보니 이혼을 하고 있었다.
이제 한 울타리의 사람이 아니니까.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내가 이렇게 억울했어요."
근데 여기도 대나무숲은 아니었다. 이러한 외침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너무 행복해 보이네.'라는 쓸데없는 비교가 되어 다시 내게 날아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을 아끼게 되었다.
아. 그래도 너무나도 답답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누군가는 공감해주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랑거리와는 거리가 조금 있고.
치부라고 하면 치부일 수 있지만, 아무나 느끼지 못하는 나의 감정과 경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억울하지 않게 살아야 하니까.
이렇게 쓰다 보면 안 억울하고, 시~원 할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글을 쓴다고 억울함의 방이 폭삭 주저앉지 않았다.
그 방은 조금씩 조금씩 마음속에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억울함은 '이해'라는 것이 되어 내 마음속에 녹아 스며들고 있었다.
글을 쓰니 억울함이 이해로 변하기 시작했다.
억울함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언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는데,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다.'라고 하고. 남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신세가 처량할 때는 '서럽다.'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단지 일이 안 풀려 처지가 딱한 것인데 남을 탓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해의식'이다.
'남 탓'만 하기 때문에 억울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는지.
'서러움'과 '억울함'을 혼동한 것은 아니었는지.
자기 방어를 위해 '피해의식'에 찌들어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글을 쓰면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억울했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서러운 것이었으며, 때로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던 나였음을 인정한다. 매 순간 억울하지는 않았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글로 써보자.
쓰다 보면 나를 돌아보게 되고, 관계가 객관화되고, 마음이 넓어진다.
마음이 넓어지면 기존의 '억울함의 방'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그러다 보면
그 일은 덜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전혀 억울하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