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교 가는 길 : 아쉬운 생일

'23. 10. 28.(토)

by 밍작가

2주만에 공주를 보러 가는 날이다.

여김없이 새벽기차를 타고 수서역으로 간다.

오후에 공주를 보러 갈 것이기에 천천히 가도 되지만, 안과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아침일찍 강남역으로 갔다.


강남역은 갈 때마다 참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곳이다.

전 사람과 소개팅을 했던 곳.

총각때는 친구들과 '밤사(밤과 음악사이)'에서 즐기며 밤을 새우던 놀이터.

많은 사람들과 추억이 있는 곳.


지금은 없어진 소개팅을 했던 레스토랑 자리, 밤사가 있던 골목, 신논현에 있는 이춘복 참치, 강남역 뒷골목에 있는 '미술관'이라는 술집 등..


그 때의 그 사연이 생각난다. 어떤 사연은 참 오글거린다. 휴.


안과검진은 금방 끝난다. 다소 정 없는 여자 의사선생님은 항상 같은 말을 한다.

"이상 없으시네요. 불편한데는 없으시죠? 내년에 뵐게요."


공주 보러가기까지 시간이 좀 남는다. 아침 일찍 교보문고에 간다.

한산하다. 독서 테이블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책을 한 권 읽고 나서, 맞은 편에 있는 버거킹에서 배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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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햄버거가 물리는 나이가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서는 공주를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한창 가고 있는데 전 사람에게 전화가 온다.

오전에 결혼식을 다녀왔는데, 공주가 낮잠을 안잤다고. 내일 올 수는 없냐고 묻는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약속시간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하면 어쩌라는 건지...


그리고 우리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행사인 '결혼식'에 굳이 데리고 갔다는 것도 맘에 안든다.

https://brunch.co.kr/@mingjak/14

느낌에는 직장동료 결혼식인 것 같은데, 언제부터 사람들을 그렇게 챙겼다고..


전 날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고 포스팅을 했었다.

인간관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비난, 비판, 불평을 하지 말라고 한다. 몸소 실천을 하려고 했으나...

첫 날부터 실패다. 이 사람에게는 안 된다. 내 그릇이 아직은 참 좁다.


"공주가 나가서 떼를 쓰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냥 데리고 나갈거야."


새벽부터 저 멀리서 기차를 타고온 사람에게(어떻게 오는지 따위는 신경 안쓰겠지만),

가방에는 헬로키티 인형과, 고양이 티셔츠와, 패딩을 바리바리싸들고 올라가고 있는 사람에게,

한 시간 전에 오지 말라고 하는건. 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아닌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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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서 2주만에 공주를 본다.

"공주 아빠왔어~"

"아빠빠~~"

"공주! 아빠가 선물 사왔지~ 그냥 냥냥이가 아니라 키티라는 이름이 있는 냥냥이 인형이야~"


무척이나 좋아한다. 껴안으면서 연거푸 "냥이, 냥이, 냥이~~냥냥냥냥~"하며 난리가 났다.


고양이 티셔츠도 좋아했다.

지난번 고양이 카페에 갔을 때 옆에 있는 다른 아이 옷에 고양이가 그려진 걸 보고 손으로 가르키며 '냥냥이~ 냥냥이~'하는 걸 보니, 우리 공주님도 고양이 티셔츠를 하나 입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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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핑크색 냥냥이 티셔츠를 본인 앞에다 대보고 아주 좋아라 한다.

바로 입혀보고 싶지만, 전 사람이 이야기한다.


"엄마가 한 번 빨아가지고 입혀줄게~"


한 번 입혀보고 잘 어울리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고 싶지만, 됐다. 싸우기 싫다.


그리고 공주를 데리고 잠실로 '고양이 미술사'를 보러 가야했기에 시간도 없었다.

세계의 명작들의 주인공을 고양이로 그려낸 전시회.

이 전부터 데려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되었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10월 29일까지 전시가 이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술관에 가보는 공주.

낮잠을 덜 자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기도 했다.

에휴. 그놈의 결혼식. 참 싫다.(굳이 내가 가는 날인데 무리를 해야하는가? 아니다 됐다. 불평은 그만.)


공주는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 앞에 고양이 그림이 너무 많으니 찡찡대다가도 '냥이~냥이~'외쳐대며 엄청 신나한다. 찡찡댈 때 쯤이면 고양이 그림 앞으로 데려간다. 그러면 또 기분이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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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시회가 끝나갈 때 즈음, 한계가 온다 볼거 다보고 나니 졸려지기 시작하고 엄마를 찾기 시작한다.

뭔가 다른 즐거운 자극을 주어야 한다.


길 건너에 있는 석촌호수로 갔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엄청난 인파들이 석촌호수에 있었다.

공주와 석촌호수를 걷기 시작한다.


21개월이 되어가는 공주는 자연에 관심이 많다. 꽃과 낙엽을 만지고, 조그마한 이름모를 열매들을 따며.. 신나게 뛰어논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이쁘게 물 든 단풍. 그리고 공주와 함께 간만에 광합성을 하는 날이었다.

스크린샷 2023-10-29 오후 2.54.36.png 공주가 뽑은 랜덤박스, 가장 시그니쳐인 고양이 소녀를 뽑았다.

걷다가, 멈추고 낙엽과 꽃과 놀고, 또 걷다가 열매를 따고 하다보니 반바퀴정도 돌았다.

갑자기 공주가 걷지 않고, 안아달라고 한다.

안고 나니 자세를 잡는것이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 다리를 굽히는 것이 편안한 자세를 잡는다.


5분도 안되어서 골아떨어진다. 피곤했나보다.

내 어깨 위에서 공주를 재우다가 공주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일단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석촌호수 옆에 있는 아웃백으로 간다. 공주도 처음으로 가보는 아웃백일 것이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이혼하고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크게 기대를 안하면 나빠질 것도 없다는 걸 알기에.


생일 날 축하한다는 인사도 없이 실비보험 가입 관련해서만 이야기 하고 전화를 끊던,

생일인데 친구랑 한 잔 하고 들어간다고 그 새벽에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던,

그런 과거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일도 없는게 평화롭다.

생일이라고 30만원 이체해주고 끝내는 그런 영혼없는 거래행위를 안해도 되니 좋다.


그래도 내 핏줄하고 생일상은 먹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간만에 칼질을 하러 갔다. 공주랑 단 둘이.


아웃백 점원이 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자고 있는 공주를 안고서 아웃백에서 자리를 잡는다.


계속 재우다가는 오늘 안에 밥먹고 집에 못들어갈 것 같다.

잠든지 한 시간정도 되었을 때, 공주를 깨운다.

기분이 별로시다.


기분이 별로일 때에는 아기상어가 답이다.

유튜브를 틀어준다. 기부니가 엄청 좋아지시지는 않지만 울지는 않으신다. 다행이다.


눈은 아기상어를 보고 있으면서 스테이크와 치킨텐더 샐러드를 야금야금 받아먹는다.

잘 먹어서 다행이다. 조금 걱정했었는데..


공주는 본인 생일이 아니어도 케익에 초를 붙여서 파티하는 걸 좋아한다.

조그만 케익이라도 사들고 가서 아웃백에서 하고 싶었는데.

공주가 자는 바람에 못하고..^^ 마음 속으로만 불을 붙여본다.


'어제 아빠 생일이었는데, 그래도 공주랑 같이 생일상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다. 고맙고, 사랑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공주를 집에 데려다주고 기차를 타러 수서로 간다.


내려가는 길에 엄마에게 카톡이 온다.

"엄마는 혹시 집에 올까해서 미역국에 불고기도 해두었는데 안됐네..."


엄마도 혼자 된 아들이 생일날 외로울까봐 미역국 해뒀는데,

아들이 집에 오지 않아서 아쉬우신가 보다.


딸내미랑 초에 불 못붙였다고 아쉬움을 느끼고, 미역국 끓여둔 엄마를 아쉽게 만드는..


참 여러모로 아쉬운 36번째 생일이었다.


미련이 남아 서운한 상태. 아쉬움.


그래도 내새꾸랑 촛불을 붙이고 싶었는데, 못붙여서 아쉽고.

엄마는 내새꾸가 생일날 외로울까봐 요리를 해뒀는데, 못 먹여서 아쉽고.


안타깝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이지만 뭐 세상 사 다 만족스러울 수는 없으니까.

아쉬움도 있어야 만족도 있는거니까. 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려니 하고. 너무 기대 말고.

그냥 보통날인 것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공주 보러 가기 위해 일찍 잠들었던 날.

그랬던 날이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의 아쉬움 정도야 참을 수 있지만,

오랜기간의 아쉬움과 더 큰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아빠가 더 열심히 살게.

사랑해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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