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우리 엄마 선물은?

귀차니즘 절정 예비신부가 플래너를 만난 첫 날, 며칠 뒤 문득.

by 밍지뉴

바람이 꽤 차가워 진 것 같은 가을이다.


어쩌다보니 결혼식 날짜를 잡고, 예식장을 예약해 두고 나서 '아 이제 다 되었다'하고 있었는데 결혼할 생각도 없는 친구들이 조언 폭격을 시작했다. 여튼 이래 저래 쓸모 있는 조언과 쓸모 없는 조언들을 추려보니 결론은 '내년 2월 결혼인데, 결혼 준비가 늦었다'란 것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무리 결혼식 날 우주 최고 예쁜 내가 되고 싶은거 까진 아니라고 하더라도, 날짜에 쫓겨 호구가 되기도 싫었다. 부랴부랴 소개를 받아서 웨딩플래너님(이하 '플래너')을 만났다.


10월 중순 쯤. 아직 일도 다 끝내지 못하고 늦은 저녁 8시가 넘어 플래너님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밖은 까맣기만 한데, 대낮처럼 사무실이 하얗고 환했다.


뭘 아는게 있어야 궁금하다, 뭐는 어떻냐 하고 물어라도 볼텐데, 심지어 메이크업이며 드레스에도 하나 관심 없는 예비 신부라는 나는 드레스 업체 이름 몇 개 아는게 다였다. 나 같은 신부도 있겠지 하면서도 내가 얼마나 멍청해 보일지, 그게 아니라면, 신부가 적어도 결혼식이라는 것 자체에 얼마나 성의가 없어보일지 걱정도 됐고 무엇보다, 아무것도 모르니 호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 밑부터 스멀스멀 손 끝이 시릴 정도로 올라왔다.


프로여서인지, 나 같은 신부도 여럿인건지 모르지만 플래너는 "그럼 처음부터 설명 해드릴게요." 하면서 운을 뗐다.


결혼이라는게 아무리 인륜지대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스드메 업체는 왜이리 많으며, 뭘 하고, 뭘 안하고, 어떤건 생략해도 되고, 어떤건 지방 마다 다르고 뭐 이리 복잡하단 말인가. 한복은 살 수 도 있고, 대여 할 수도 있고, 폐백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이바지 음식은 하는 경우가 있고 안하는 경우도 있고. 숨도 못 쉴 정도였다. 메모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정보 폭격에 나는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귀를 내맡겼다. 그리고 85% 정도는 그냥 흘려버린 것 같다.


프로이다보니, 결혼 준비를 하면서 예산은 얼마나 잡고 있는지, 어떤 걸 준비하는지, 너희들의 경제 사정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지만, 프로이기 때문에 너에게 특별히 이 결혼을 욕먹지 않고 잘 준비하는 팁을 알려줄게 하면서 플래너가 말을 꺼냈다.


예단이야, 요새 집이 워낙 비싸다보니 집값에 보태고 안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그래도 아들래미 장가보내고 나서 '우리 며느리'가 '해왔다'며 친척들,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할만한 "꺼리"는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반상기며 비단금침 같은거야 잘 하지 않지만, 그래도 시댁 침대에 둘 이불 한 채는 하는게 좋다, 좀 더 실속 있는게 좋다면 시댁의 "눈에 띄는 가전"을 바꿔 드리는 것도 좋다는 거였다.


결혼 할 때야 사실 그냥 좋은게 좋은거다 싶고, 다 생략하자, 하고 넘어가면서도 실제로 결혼하고 나면 명절마다 네가 그 때 뭘 해왔네, 안 해왔네 하기도 한다고. 우리 평생 그런 소리 듣지 말고 기왕 쓰는거, 하나 더 쓰자고.


고마웠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내 결혼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먹을지 안먹을지는 모르지만 먹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욕을 먹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 내게 쓴소리를 해 주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결혼할지도 몰라요'랬더니(간이 작아서 아직 "결혼한다"고 말 못한다), 회사 선배가 똑같은 소리를 한적이 있다. 자기는 예물 다 받고 예단 다 해서 보냈지만, 아무리 다 생략한다고 하더라도 꼭 시댁에 가전 하나는 바꿔 드리라고, 그러면서 "어머니~ 제가 너무너무 약소하지만 그래도 어머님께 뭐라도 꼭 해드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면서 뭔가는 드려야 앞날이 편하다고.


그 때에는 '아, 저 선배 유난하다', 하는 생각 뿐이었는데, 플래너에게 들으니 '아 이게 일반적인 거구나' 싶었다.


그 날 플래너에게 들은 얘기 중 신랑이 준비해야 할 것들, 또 내가 기억하는 15% 정도를 남자친구에게 와다다다 쏟아내고 난 후, 저녁 열한 시 쯤 회사에 복귀해 남은 서면을 쓰다가 체했다.


며칠이 지났다.

문득 집에 돌아가는 남자친구를 터미널에 데려다 주러 가는 길에 그날의 체기가 올라왔다.

항상 나는 속상한 것, 기분 나쁜 것을 그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며칠 후 안개가 걷히듯이 형체를 드러내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이상했다.

왜 나는 평생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 시댁에 예단을 하지 않는 대신 가전을 바꿔 드려야 하는가. 그리고, 왜 우리 엄마는 잘키운 딸래미 시집보내서 우리 사위가 이런걸 우리 집에 해왔어! 하고 자랑할만한 그 무엇을 준비하라는 소리를 신랑에게 하지 않는 것인가.


결혼하는 커플의 사정이야 다 제각기고, 플래너가 내 사정, 우리 사정을 다 알고 한 말은 아니란 걸 안다. 같이 결혼을 준비하고, 내가 모아둔 돈으로 결혼을 하는 우리의 사정이,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사정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도 안다. 그래도 서러웠다. 잘 키운 아들은 가전 값을 하지만, 잘 키운 딸은 그냥 출가외인인 사실이. 그리고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지금도 고민한다.

이런 말을 들은 예비 신부라면, 자신의 결혼 생활(+시댁과의 관계)가 200만원만 투자하면 훨씬 나아진다는데, 이런건 고민할 거리도 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을것 같다. 그래도, 나는 고민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는 고민하고 싶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다. "그럼 우리 엄마 선물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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