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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Oct 20. 2023

아니, 커서 뭐가 되고 싶냐니요, 그런 황당한 질문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는 그 질문이 당혹스러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정작 그 질문을 하는 어른들에게 “당신은 뭐가 되고 싶었나요?” 혹은 “당신은 무엇이 되어있나요?” 아니면 “당신은 되고 싶었던 것이 되어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시원하게 대답할 어른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흔이 넘은 지금은 안다.

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장래 희망 칸에 무언가를 쓸 때마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고작 십여 년 남짓 살아봤는데, 세상에 어떤 직업이 존재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본 것보다 못 본 것이 더 많은데, 어떻게 장래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칸을 비워 두면 왠지 모르게 낙오자가 되는 기분이라 어떻게든 그 칸을 멋지게 채울 수 있는 직업을 찾으려고 애썼다. 나는 내가 매일 보는 권위 있는 자, ‘선생님’을 장래 희망으로 정했다. 교육을 통해 이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거창한 꿈은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힘이 세 보였고, ‘학교 선생님’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고 어른들이 입이 마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자꾸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나는 본격적으로 내가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당시 나나 주변 아이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꿈은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의사, 판사, 선생님, 경찰, 연예인 같은 것 말이다. 도저히 이런 직업에 범접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두루뭉술하게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던 나는 그 누구도 내게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피아니스트를 장래 희망으로 정했다. 수영보다는 잘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멋있어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내게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었고, 중학교 때부터는 예체능이 아닌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이유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피아니스트의 꿈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꿈이라는 말이 내게 조금 더 또렷한 모양을 갖게 된 계기는 영화 <타워링> (1974)이었다. 텔레비전으로 그 영화를 보며 영화가 줄 수 있는 강력한 희열을 느꼈다. 하나의 매체가 인간을 이토록 쥐락펴락 할 수 있다니! 그 뒤로 나는 리버 피닉스와 장국영을 쫓았고 비디오 가게 단골이 되었다.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함께 영화 포스터 엽서를 사러 다녔고 집에서 <동사서독>을 보는 날이면 무슨 대단한 평론가라도 된 것처럼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무도 떠들지 못하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막연히 영화와 관계를 갖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서른일곱이 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영화를 사랑했고 영화와 관련된 일을 했으니 말이다. 이때까지 내게 꿈이란 건 직업과 관련이 많았고, 직업은 나를 정의하는데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았다. 그렇다. 나를 온전히 내어주어야 할 수 있는 그 일. 엄마 말이다. 나는 일도, 공부도 하지 않고 아이와 집안을 돌보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엄마가 되기 전 느낀 우울이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면 아이를 낳고서 느끼는 우울은 나를 잃는 데서 왔다. 아이를 낳고 나는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영화 전문지에서 연말마다 뽑는 10개의 영화 중 절반 이상은 자연스레 섭렵했던 내가 한 편도 못 본 것을 넘어서 감독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를 정의한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육아로 인해 내 인생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지니 나라는 사람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때는 그래도 영화에 대한 열정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어 영화를 보려고 했고 글을 쓰든 영상을 만들든 꾸준히 영화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전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내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 타의에서 시작해 이제는 자의에 의해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졌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엄마도 좋고 아내도 좋은데, 나, 나는 어디 있냐는 말이다. 게다가 난 마흔이 되도록 꿈의 끝에 가보지도 못했다. 영화감독이 되어 세상에 질문을 던지지도 못했고, 영화학자가 되어 예술을 통해 세상을 구하지도 못했다. 물론 엄마라는 직업이 위대하긴 하지만 자식이나 남편과 연결되지 않은 나만의 것이 필요했다. 영화를 잃고 나서 나는 한동안 그것을 찾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시간을 보내다가 어쩌면 이게 나의 정체성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꿈이 꼭 명확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꿈이 반드시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지금 나를 정의하는 것은 삶을 향한 나의 태도이다. 예민하지만 다정하고 미지의 영역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는 열린 사람이고 싶다. 사람의 마음은 꺼내 놓은 점토와 같아서 나이가 들수록 딱딱하게 굳는 것 같다. 말랑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주물러 주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것, 하던 것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사람, 세상에 작게나마 이바지하는 사람, 아니 더 거창할 필요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사람, 나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나만의 고유한 색을 갖기 위해 다양한 자극을 만나고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그리하여 요즘 나의 꿈은 계속 구르기는 하는데 정확히 뭐 하는지는 모르겠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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