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활 십 년 차. 나는 이방인이다. 그런데 나는 이방인이라는 말이 좋아하지 않는다. 소속과 집단의 필요성을 전제로 하는 말 같아서 그렇다. 그런데 어쨌든, 나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슬프다. 겉으로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마도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그룹이나 단체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이렇게 말한다.
“이름에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장미를 무엇이라 부르든 장미가 가진 향기는 변함이 없잖아요.”
그렇다면 장미의 향기를 가진 튤립은 누구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편안할까. 아마도 같은 처지에 있는 튤립의 향기를 가진 장미? 이렇게 이들은 다시 소속을 만든다. 남들과 다르다는 특징을 가지고 말이다. 이름은 이름일 뿐 향기는 그대로라고 하지만 소속은 아니더라도 함께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함께 한다는 연대감은 결국 삶을 살아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 같다.
이방인 이라는 말은 아마도 곁에 아무도 없다거나 나만 다르다고 느끼는 존재에게 줄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프랑스의 길가를 혼자 걸을 때, 프랑스에서 가게에 혼자 들어갈 때, 프랑스 사람을 혼자 만날 때 이방인 이라고 느낀다. 나는 웬만한 프랑스어는 다 읽을 수 있으며 필요한 의사소통이 가능한데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떠나온 지 십 년이 된 한국을 방문할 때는 이방인이라고 느낄까. 신기하게도 그렇지 않다. 십 년 전 내가 살던 한국과 같은 모습은 아니라 낯설 때는 있다. 한 번은 택시를 타려고 길에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잡는 것이 힘들었다. 처음엔 어째서 힘든 것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친구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알았다. 다들 휴대전화로 택시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십 년 전에 하듯이 그렇게 길에서 쉽게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떠나온 시간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방인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나라로 따지면 프랑스에 있으면 이방인, 한국에 있으면 외계인 정도로 느껴지고, 프랑스에서 내가 이룬 가족이나 한국에서 내가 이룬 가족 안에 있을 때는 완전한 소속감을 느낀다. 프랑스에서 거의 매일 보는 지인들과 있을 때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만, 한국에서 일 년에 한 번 보는 친구들과 있을 때는 소속감을 느낀다.
이방인 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의 거리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글을 이해하고 대화가 통하는 것 보다는 사물이든, 나라든, 사람이든, 그것과 나의 마음의 거리가 나를 이방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주는 것 같다.
“친구란 다른 사람들은 어려워하는 당신의 특징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하이케 팔러가 한 말이다.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는 시간에는 그 어떤 공간에서도 당신은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집 밖에만 나가면 이방인으로 사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