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같은 수학 공식 말고, 세상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 내게 당연하다는 말은 무척 일방적으로 들린다. 양방향이 아니더라도, 혹은 평등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생명들 사이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나 아닌 존재의 권리를 좀 더 마음 편하게 인정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들에 감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벽 배송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돈을 냈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나 대신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파는 사람의 노고가 필요하다. 남들이 일하기 꺼리는 시간에 일하는 사람은 당연히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하며 그런 의미로 직업의 귀천도 논할 수 없다.
얼마 전,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해외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정책만 놓고 봤을 때는 프랑스와 한국의 사정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한국에 더 좋은 정책이 많다고 느꼈고 외국에 거주하는 주변 엄마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8 시 30~45 분까지 등교해서 오후 4 시 30~ 5 시 즈음에 끝난다. 대신 수요일을 제외하고 주 4 일만 학교에 가고 90 일에 한 번씩 2 주의 방학이 있다. 그뿐인가. 파업도 종종 있고, 아침에 학교 앞에서 선생님이 아파서 못 오셨으니 아이 데리고 다시 집으로 가든 아이를 다른 반에 맡기든 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학교가 없는 날, 어떻게 할까? 선택사항은 한국과 비슷하다. 조부모나 베이비 시터가 방과 후부터 학부모 퇴근까지 아이를 돌보거나 학교의 방과 후 돌봄 교실, 혹은 썽트르 루와지르 centre loisir (학교 외의 방과 후 교실)에 간다. 이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신 분은 한국의 방과 후 교실은 정원이 적을 뿐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아이들을 돌봄만 해서 아쉽다고 말씀하셨다. 즉, 방과 후 돌봄에 학습이나 활동이 없어서 아이들이 학원을 전전하게 된다고, 그렇게 사교육비 부담이 엄청나다고 하셨다. 나는 여기서 차이를 느꼈다. 왜냐하면 프랑스 학교의 방과 후 돌봄도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간식을 먹고 부모님이 올 때까지 삼삼오오 모여 노는 것이 다다. 그렇기에 돌봄 교실 선생님은 한 둘이면 충분하다. 돌봄 교실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학습이나 돌봄이 가능하여지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 그러면 모두에게 접근이 쉬운 돌봄 교실 비용을 책정하기 어려워진다. 프랑스의 돌봄 교실은 정말로 아이들을 감시만 해주기 때문에 한 시간에 몇천 원 꼴로 저렴하고 신청 대상의 기준도 없으며 일주일 전에만 신청하면 필요한 날짜에만 그때그때 신청할 수도 있다. 결국은 학습에 대한 부모들의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한국의 낡은 직업관 및 노동관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나와서 번듯한 회사에 간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석박사를 하고 유학을 하며 스펙을 쌓느라 적절한 임신 시기를 놓쳐 난자를 얼린다고 한다. 적성이 공부가 아니어도 모두가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육체노동은 당연하며 누군가의 지식노동은 당연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정책이 아니라 의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노동 인식을 바꾸고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해결책인 것 같다.
당연한 것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얼마 전 친구와 챗 GPT 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케냐의 노동자들이 9 시간씩 교대 근무하며 학대, 수간, 살인, 자살, 고문, 자해, 근친상간 등의 폭력적인 내용들의 텍스트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을 텍스트 라벨링 노동자라고 부르는데 이전 챗GPT에서 보인 결함, 예를 들면,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문장을 보정하기 위해 어둡고 폭력적인 텍스트에 라벨링 하는 일을 한다. 텍스트를 분류하고 동영상에 태그를 붙이고, 사진에 주석을 달고, 오디오를 텍스트로 변환하며 이들은 시간당 고작 1.5 달러를 벌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기도 한다. <챗 GPT 와 디지털 식민지>의 저자인 이송희일 감독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공지능,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공지능이라는 신화는 애초부터 환상이라고 말한다.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를 두고 생각하면 우리는 더 주의를 기울이고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알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관심을 둔다는 것은 대상에게 마음을 쓸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던 것에 이해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된다. 집단 간의 혐오가 팽배한 시기에는 더욱이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듯 행하는 마음은 내가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는 식의 계급이 존재하는 배려를 넘어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것이며 각 집단은 배려를 통해 내가 손해 볼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 집단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당연한 권리가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참고자료: [이송희일의 견문발검] 챗 GPT 와 디지털 식민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715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같은 수학 공식 말고, 세상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 내게 당연하다는 말은 무척 일방적으로 들린다. 양방향이 아니더라도, 혹은 평등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생명들 사이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나 아닌 존재의 권리를 좀 더 마음 편하게 인정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들에 감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벽 배송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돈을 냈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나 대신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파는 사람의 노고가 필요하다. 남들이 일하기 꺼리는 시간에 일하는 사람은 당연히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하며 그런 의미로 직업의 귀천도 논할 수 없다.
얼마 전,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해외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정책만 놓고 봤을 때는 프랑스와 한국의 사정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한국에 더 좋은 정책이 많다고 느꼈고 외국에 거주하는 주변 엄마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8 시 30~45 분까지 등교해서 오후 4 시 30~ 5 시 즈음에 끝난다. 대신 수요일을 제외하고 주 4 일만 학교에 가고 90 일에 한 번씩 2 주의 방학이 있다. 그뿐인가. 파업도 종종 있고, 아침에 학교 앞에서 선생님이 아파서 못 오셨으니 아이 데리고 다시 집으로 가든 아이를 다른 반에 맡기든 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학교가 없는 날, 어떻게 할까? 선택사항은 한국과 비슷하다. 조부모나 베이비 시터가 방과 후부터 학부모 퇴근까지 아이를 돌보거나 학교의 방과 후 돌봄 교실, 혹은 썽트르 루와지르 centre loisir (학교 외의 방과 후 교실)에 간다. 이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신 분은 한국의 방과 후 교실은 정원이 적을 뿐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아이들을 돌봄만 해서 아쉽다고 말씀하셨다. 즉, 방과 후 돌봄에 학습이나 활동이 없어서 아이들이 학원을 전전하게 된다고, 그렇게 사교육비 부담이 엄청나다고 하셨다. 나는 여기서 차이를 느꼈다. 왜냐하면 프랑스 학교의 방과 후 돌봄도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간식을 먹고 부모님이 올 때까지 삼삼오오 모여 노는 것이 다다. 그렇기에 돌봄 교실 선생님은 한 둘이면 충분하다. 돌봄 교실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학습이나 돌봄이 가능하여지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 그러면 모두에게 접근이 쉬운 돌봄 교실 비용을 책정하기 어려워진다. 프랑스의 돌봄 교실은 정말로 아이들을 감시만 해주기 때문에 한 시간에 몇천 원 꼴로 저렴하고 신청 대상의 기준도 없으며 일주일 전에만 신청하면 필요한 날짜에만 그때그때 신청할 수도 있다. 결국은 학습에 대한 부모들의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한국의 낡은 직업관 및 노동관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나와서 번듯한 회사에 간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석박사를 하고 유학을 하며 스펙을 쌓느라 적절한 임신 시기를 놓쳐 난자를 얼린다고 한다. 적성이 공부가 아니어도 모두가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육체노동은 당연하며 누군가의 지식노동은 당연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정책이 아니라 의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노동 인식을 바꾸고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해결책인 것 같다.
당연한 것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얼마 전 친구와 챗 GPT 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케냐의 노동자들이 9 시간씩 교대 근무하며 학대, 수간, 살인, 자살, 고문, 자해, 근친상간 등의 폭력적인 내용들의 텍스트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을 텍스트 라벨링 노동자라고 부르는데 이전 챗GPT에서 보인 결함, 예를 들면,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문장을 보정하기 위해 어둡고 폭력적인 텍스트에 라벨링 하는 일을 한다. 텍스트를 분류하고 동영상에 태그를 붙이고, 사진에 주석을 달고, 오디오를 텍스트로 변환하며 이들은 시간당 고작 1.5 달러를 벌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기도 한다. <챗 GPT 와 디지털 식민지>의 저자인 이송희일 감독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공지능,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공지능이라는 신화는 애초부터 환상이라고 말한다.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를 두고 생각하면 우리는 더 주의를 기울이고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알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관심을 둔다는 것은 대상에게 마음을 쓸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던 것에 이해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된다. 집단 간의 혐오가 팽배한 시기에는 더욱이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듯 행하는 마음은 내가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는 식의 계급이 존재하는 배려를 넘어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것이며 각 집단은 배려를 통해 내가 손해 볼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 집단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당연한 권리가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참고자료: [이송희일의 견문발검] 챗 GPT 와 디지털 식민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