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아무르 Oct 21. 2023

수저는 누가 놓고 커피는 누가 사 오나요



우연히 SNL ‘MZ오피스’의 일부를 보았다. 인턴이 새로 온 기념으로 팀장이 커피를 사겠다고 했는데 인턴들이 제일 먼저 먹고 싶은 것을 말했다. 선배들은 후배가 먼저 주문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한 소리 하지는 않는다. 선배들이 속으로 한참 후배 욕을 하는데 이번엔 커피를 사러 나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이런 일은 당연히 후배가 해야 한다며 나서지 않는 선배들, 그런 선배들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어떤 이유로 가만히 있는 후배들. 그 사이에서 기싸움에 질린 한 남자 직원이 커피를 사러 나간다. 다음 이야기는 감자탕집에서 벌어진다. 반찬이 떨어지거나 뼈 통이 가득 차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식당이었는데 여기서도 그 일을 누가 할 것인가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인다. 누군가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고 누군가는 후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그런 계급적인 상황을 모른 척하고 싶어 한다. 


십 여년 전 내가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일터에서 커피 타는 일을 자연스레 여자의 일로 여기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지만 후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잘한 심부름 하는 것에 관한 풍자 코미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요즘 한국에서 어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게 했고, 십 여년 전에는 남녀의 성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요즘은 수저 논쟁이나 MZ 세대 등을 통해 세대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기사와 커뮤니티의 글을 통해 누가 먼저 수저를 놓는지가 예의와 배려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나는 예의와 배려에 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폐를 끼친다고 여겨지는 행동에 민감하다. 그것은 예의를 넘어선 한국 사람 간의 좀 더 민감하고 세부적이면서 주관적인 약속 같다. ‘개념을 탑재’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미리 알아서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개념’과 ‘배려’에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자신에 대한 혹독한 잣대가 숨어있다. 상대가 수저를 놓았으니 내가 물은 떠 오겠다는 생각은 개념이라는 말 뒤에 숨어 서로에게 과한 기대를 하게 한다. 식당에서 타인을 위해 먼저 수저를 놓는 사람, 먼저 일어나서 물을 떠 오는 사람, 반찬 떨어지지 않게 알아서 척척 떠오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선한 사람이 된다. (이것들이 궂은일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미처 그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은 묘한 미안함을 느낀다. 


오랜 타국 생활 뒤에 한국을 방문하면 수저를 미리 놓는 것을 잊는 나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상대를 보며 이야기하느라 바쁜데 정신 차려보면 친구가 수저를 놓고 있다. 내 이야기에 대답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걸 보고 나서야 한국식 배려를 잊은 것을 자각한다. 내가 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는 그것이 배려의 행동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의가 없는 사람인가. 


나는 수저를 놓는 것을 잊을 정도로 친구에게 몰두했다. 그것도 친구에 대한 친절 아니었을까. 나이나 계급에 따른 의무나 예의범절이 많은 사회다 보니 ‘MZ오피스’에서 보이는 갈등이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배려나 친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려라면 당연히 계급에 상관없이 행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평등과 다양함이 중요해지는 이 시대에 계급에 따른 예의를 따지는 것은 모순이다. 어쩌면 우리는 과도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계급이나 집단이 아닌 다양한 개인이 중요해지는 시대로 가는 도중 배려와 예의의 개념이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자는 젊은 세대가 이기적이라고 여길 수 있고 젊은 세대도 개인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을 헛갈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개인적이면서 친절할 수 있다. 친절에는 대가나 판단이 들어가면 안 된다. 본질에 더 집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저야 누가 놓으면 어떠한가. 누가 먼저 수저 놓나 생각하는 대신 서로에게 집중하고 사려 깊은 대화를 하면 어떨까. 물론 행위가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간혹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행위를 하지만 사실 그 행위 뒤에는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싫은 두려움’이 숨어있고 그러다 보니 안 하는 사람을 보면 배려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서로 눈치만 보는 것 아닌가 싶다. 자연스럽게 살면 좋을 것을,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노키즈존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이는 내 맘대로 안 돼서 이따금 통제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다는 너그러운 마음. 자연스러운 것을 인정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이라는 존재가 뛰는 것 좋아하고 앉아있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배우는 과정에 있으므로 부모와 커피숍이나 식당에 가는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 막으면 배울 수 없다. 연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 연습이 한두 번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알아서 공공장소에서 얌전한 어린이가 되라고 할 수는 없다. 어린이는 팔딱팔딱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장소에 따라 어디서 팔딱거릴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놀이 공간이 있는 식당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에는 패스트푸드점 말고는 놀이공간이 있는 식당이 없다. 식당에 놀이공간을 만드는 대신 종이와 색연필을 준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것이 어려운 아이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나 부모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그렇게 프랑스 아이들은 식당은 앉아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예의를 핑계로 아이들이 배울 기회를 박탈하면 안 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중과 배려라는 말에는 경계해야 하는 구석이 있다. 친절이 계속되면 호구가 된다는 말, 당연한 친절은 없다는 말은 불편하다. 내가 친절을 베풀었을 때 상대가 그것을 이용하거나 내가 기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당연하듯 왕이 되어 그것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는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타인을 이해하려고 조금만 더 노력해 본다면 존중과 배려가 없어 보였던 그 사람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날 하루가 너무 힘들었을 수도 있고 배려라는 것을 가르쳐줄 어른이 주변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풍파에 마음이 바싹 말라버렸거나, 아이 저지레에 몇 년을 커피숍에 가지 못하다가 용기 내 간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 선하다고 믿고 싶다. 서로를 조금만 더 가여워하면 어떨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 사람의 속사정에 관심을 두는 마음 말이다.


내가 건넨 친절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친절을 받은 사람이 다른 이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친절할 수 있으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혼동하면 안 된다. 경제적 여유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자신에게 친절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친절을 베풀 줄 아는 법이다. 내 친절이 타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사랑을 쌓아준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주변에서 조금씩 나누어 준 사랑으로 누군가의 마음도 찬다면 아마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친절하지 않은 마음은 가난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니까. 

이전 04화 이방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