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아무르 Oct 21. 2023

손님은 왕이다



샤워부스에서 물이 샜습니다. 시공업체에 연락해 고치려고 했지만, 공사에 능숙하신 님의 (저는 글을 쓸 때 남편을 님이라고 호칭합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마음입니다.)새아버지는 그 돈 아끼라면서 직접 공사를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남편은 감사한 마음으로 새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인터넷으로 구매했지요. 


따르릉. 혼자 집에 있던 어느 날 오후, 벨이 울렸습니다. 받아보니 택배기사님이었습니다. 


“내려와서 택배 받으세요.” 


지금이야 아파트 정문까지 나와서 택배 받으라는 택배기사님의 말이 익숙하지만, 프랑스 정착 초 기에는 그 말이 이해 가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정당하게 배송료를 내고 서비스받는 입장인데, 무 엇 때문에 택배기사님은 집 앞까지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인지. 게다가 5~6kg이 넘는 무거운 물건도 아랑곳없이 아파트 정문에서 건네받을 때는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지요. 한국처럼 택배 차 량이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규정도 없는데, 단순히 들어오기 귀찮거나 더 많은 배송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전화해서 저를 불러내고, 무겁든 말든 물건만 휙 건네주고 가는 택배 기사님이 정 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직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샤워부스를 공사할 당시, 저는 온갖 경험에 욕하고 분노하며 한국만 한 곳이 없다고 울부짖는 시 기를 거쳐 슬슬 프랑스 생활에 적응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 앞까지 배달해주 지 않는 경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별생각 없이 하나, 둘, 셋, 넷... 계단을 내려갔습니 다. 당시 저희 집은 한국식으로 3층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없었습니다. 내려가서 택배기사님이 트럭 문을 열고 제 짐이라고 꺼내는 물건을 보는데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제 몸보다 훨씬 큰 크기의 공사 자재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눈은 자연스레, 저와 짐을 함께 나를 택배기사님에게로 향했지요. 


작은 키, 마른 몸. 저와 체구가 비슷한 여인이었습니다. 트럭에 공사 자재만 있는 걸로 봐서, 그분 은 일반 택배를 배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택배도 아니고 공사 자재를 이런 작은 여자가 배달한다고? 휴. 힘들게 올라가겠군.’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한탄이 나왔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센 남자 택배기사님이었다면 덜 고 


생했을 텐데, 생각했지요.
 택배기사님이 그 물건을 혼자서 꺼낼 수 없는 건 당연했고, 저는 그분을 도와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택배기사님이 떠나고, 그 거대한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아까와는 다른 생각이 들 었습니다. 남자들만 할 수 있는, 혹은 남자들이 더 잘할 일이라는 선입견 없이 자신의 생업을 선 택한 것은 어쩌면 그분 스스로 성별이나 직업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뜻일지도 모르며, 남들의 편 견에 맞서는 훌륭한 선택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일한 제가 남자들이 많이 하는 일은 곧 힘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여자가 하기엔 힘든 일이라는 선입견부터 들이민 것을 반성했습니다. 남자들보다 못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남자들과 똑같이 무거운 장비를 들고, 악착같이 열심히 일했던 제가 잠시나마 그런 선입견을 품 었다니,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무거운 거 좀 못 들어도 고객과 같이 들면 결국 어떻게든 배달은 되는 건데. 한국에서 무의식 중 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돈을 낸 만큼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즉 ‘고객은 왕’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같이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한다는 데에 잠시나마 불편해한 제 태도가 실망스러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 이 세 가지 가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세 가지 단어가 프랑스의 삶의 모습을 정확히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때로는 이 개념들을 오용 혹 은 남용하여 개인 및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람들은 한국 사 람들보다 개인주의적입니다. 서비스 제공자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서비스를 엉망으로 하거나 직 업 교육엔 관심이 없어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서비스 를 구매해도 때로는 구매한 가격만큼의 서비스받지 못할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저 그러려니 해 야 합니다. 돈을 받는 서비스 제공자라도 기분이 나쁘면 그것을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서비스 제 공자든 구매자든 돈으로 좌지우지되는 힘의 논리가 없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 로는 돈을 낸 만큼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싸움닭이 되어야 하기도 합니다. 물론 서로 책임을 돌릴 것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싸워야 하지요. 정착 초반에는 본인 개인 사정으로 기분이 좋지 않 다고 저에게 화풀이하는 공공기관 직원이나 퇴근 삼십 분 전부터 가방 싸 놓고 옆 동료와 수다 떠는 마트 직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살아보니 프랑스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직함이나 사회적 이름으로 계급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낮을 사람을 평등하게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 다. 그렇게 고객은 왕이 될 수 없었지요. 아무리 당신이 내 서비스를 산다고 해도 내가 기분이 나 쁘면 기분이 나쁜 것이고 휴가를 가야 하면 휴가를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고객으로서 불편했기 때문에 불평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온 택배는 이미 두 번이나 분실되었고 한 번은 잃 어버릴 뻔한 걸 오만 노력을 해서, 그러니까 남편이 싸움닭이 되어서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공 공기관의 서비스는 또 얼마나 느린지요. 함흥차사도 이런 함흥차사가 없습니다. 상점에서 친절한 서비스요? 친절하면 오히려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들이 불편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 다. 서비스 제공자를 백 퍼센트 신뢰하지 않게 되었지만 적어도 내가 손님이므로, 즉 돈을 내는 자가 목소리가 더 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돈과 서비스를 교환한 다 생각하고 감정은 배제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돈과 사회적 지위로 계급을 나누지 않 고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편해집니다. 까칠한 서비스 제공자를 만나면 그냥 오늘 하루가 참 힘들었나보다 생각하고 필요한 것만 취한 뒤 곱씹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혼자 아파트 건물 앞으로 내려오는 걸 본 공사 자재 택배기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집까지 옮기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분은 제가 그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즉, 집까지 공사 자재를 들고 올라가는 일이 꼭 자기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세상이 그런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돈을 냈든 누가 더 큰 힘을 가졌든 서로 도 우면 더 아름다워지는 것 말입니다. 택배기사와 고객이 아니라 조그만 체구의 두 여자가 자신들 




보다 훨씬 더 커다랗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기 위해 서로 돕고 함께 일했다는 것. 사회가 만든 기 준, 성별, 직업, 나이, 외모 등을 없애면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