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언덕 (2014) - 홍상수

시간이 존재하는 법

by 몽아무르
시간은 우리 몸이나 이 탁자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진화를 한거라서, 어쩔 수도 없고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Time is not a real thing like your body, my body or this table. Our brain makes a mind frame of time continuity: past, present and future. I think we don’t have to experience life like that necessarily. But at the end, we cannot escape from this frame of mind because our brain evolves this way. I don’t know why.[1]


이것은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항상 들고 다니던 모리가 시간에 대해 한 이야기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선형적이지 않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간들 역시 선형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유의 언덕>에서는 여행 중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그 사람이 여행을 한 시간적 순서가 아닌 우연이 만들어 놓은 순서 (떨어져 흩어져버린 편지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보여주며, <낮과 밤> (2009)에서는 여러개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또, <북촌방향> (2011)에서는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하루들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서로 상관없는 ‘첫날’ 같은 그런 하루들 [2]을 묘사하기도 한다.


홍상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시간을 이미지로 변형시키는데, 그 중 하나가 기억을 통한 변형이다. 매 순간 흐르는 시간과 인간의 의식은 기억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홍상수는 기억을 담고 있는 일기 (밤과 낮), 순서가 섞인 (기억을 쓴) 편지 (자유의 언덕), 기억의 재구성 (오! 수정)등을 이용하여 시간을 이미지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홍상수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구, 반복과 차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기억을 통해 시간을 보여주긴하지만 그가 이제껏 사용해오던 이야기 구조의 특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보다 좀 더 우연에 기댄다. 그가 이제껏 기억을 보여준 방식은, 일기의 순서를 바탕으로 하든가, 기억을 회상하는 사람들이 번갈아 하는 이야기의 식이었다면, 이번에는 매일 써온 편지를 땅에 떨어뜨려 순서가 엉망이 되는 우연성을 기준으로 한다. 뒤섞인 편지의 순서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어떤 순서로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그 또한 하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관객은 선형적으로 배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며 시간의 또 다른 존재방식을 경험한다. 어쩌면 모리의 말대로 시간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홍상수는 기억말고도 꿈과 잠을 통해 시간을 이미지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은 자주 잠에 빠지고 꿈을 꾼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것을 구분하기가 힘들고 이로써 시간은 연속성을 잃게 된다.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는 오후 5시가 되도록 자면서도 더 자야한다고 중얼거리는 잠꾼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게스트하우스 정원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모리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이 마지막 장면을 보고도 이전 씬들에서 보았던 것들 중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것이 아닌지 말할 수가 없다. 이것 역시 시간의 순서가 우연성에 기인한데서 온다.


모리의 나래이션 또한 시간의 관점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평소 홍상수는 주인공의 나래이션을 즐겨 사용한다. 보통은 가까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형식이지만 <자유의 언덕>의 나래이션은 특이하게도 시간을 가로지른다. 가장 주가 되는 모리의 나래이션은 편지글, 즉 가까운 과거, 기억이다. 여기서 청자는 모리가 편지를 쓰는 대상, 권이다. 하지만 편지 나래이션이 나오는 와중 모리의 현재 의식을 말하는 나래이션이 끼어들 때가 있다. 여기서 청자는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의식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한다.

그러다 모리와 권이 함께 언덕을 오르는 장면에서는 모리의 나래이션의 시간적 위치가 갑자기 먼 미래로 바뀐다. 그것은 현재 의식의 흐름도 아니고 권에게 쓰는 편지글도 아니다. 모리는 갑자기 먼 미래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그의 짧았던 한국 방문 이야기는 가까운 과거에서 먼 과거로 자리를 옮긴다. 갑작스러운 시간의 변화는 선형적 시간에 익숙한 우리에게 낯선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모리의 자는 얼굴로 인해 그것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우연성에 기댄 시간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그것이 꿈이다 아니다를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홍상수의 시간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나비의 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되어 있었다.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3]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일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과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홍상수의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피상적인 구별, 과거, 현재, 미래에 얽매여있지 않다. 그의 시간은 시간의 주체와 하나가 되어 존재할 뿐이다.


[1]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 중 모리의 대사

[2] 정한석, <언어주의자 김훈과 영화주의자 홍상수>, 씨네 21, 2011/09/06,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7247

[3] [네이버 지식백과] 호접지몽 [胡蝶之夢] (두산백과)

이전 02화캡틴 필립스 (2013) - 폴 그린그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