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엔데는 1929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화가였다. 1960년 첫 작품 『기관차 대여행』을 발표한 이래로, 판타지 문학의 고전이라 할 『모모』, 『끝없는 이야기』를 내놓음으로써 20세기 후반의 독일 청소년 문학을 풍요롭게 했다. 평생을 연극배우, 연극 평론가, 연극 기획자, 작가로서 치열하게 살다가 1995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작가 소개에서
동화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은 어린이의 심리를 잘 묘사한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로 전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동화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모모』를 읽으며 “시간은 곧 삶이고 삶은 그 자체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라는 내용을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화 쓰기를 수강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화가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이다.
렝켄은 부모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법을 쓸 줄 아는 요정을 찾아간다. 편한 인상에다 손가락이 6개씩 달린 ‘프란치스카 프라게차익헨’ 요정은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준다. 요정은 부모가 렝켄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원래 키의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알려 준다.
마법으로 순식간에 집에 돌아온 렝켄은 부모의 찻잔에 설탕을 넣는다. 렝켄과 다른 TV 채널을 보자고 말한 아빠가 절반으로 줄었다. 부모는 깜짝 놀랐지만 렝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번에는 의사를 부르는 일로 렝켄과 실랑이하던 엄마가 절반으로 줄었다. 영문을 모르는 부모에게 렝켄은 엄마 아빠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마법에 걸린 것이라고 말한다. 몇 차례 더 의견이 맞지 않자, 절반씩 줄어들기를 거듭하여 마침내 렝켄의 부모는 성냥갑 안에 담길 만큼 작아진다.
렝켄을 간섭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돌봐 줄 사람도 없어진다. 점심을 먹으려던 렝켄은 통조림을 따다 손을 베서 피가 난다. 부모들은 줄어든 몸으로 렝켄의 상처에 힘겹게 반창고를 붙여 준다. 친구가 데려온 고양이에게 부모가 잡아 먹힐 뻔한 일로 렝켄은 부모를 걱정하게 된다. 밖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온 렝켄은 열쇠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단에 앉아 울다 요정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된다.
렝켄은 부모를 그대로 둘 것인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요정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설탕을 부모의 찻잔에 넣기 직전으로 돌릴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말했듯이 두 번째 상담에서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 설탕을 렝켄이 먹는 것이다. 렝켄은 자기 몸이 부모처럼 줄어들까 봐 걱정한다.
“네가 네 엄마 아빠의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라고 요정이 말한다.
고민을 거듭하던 렝켄은 마지막 순간에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말한다. 마법으로 거실로 돌아온 렝켄은 손에 든 각설탕을 먹는다.
렝켄은 그 후로 부모의 말에 무조건 “네”라고 대답한다. 부모는 갑자기 변한 렝켄을 걱정하며 고민을 들어준다. 렝켄은 울면서 각설탕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걱정하던 가족들은 아빠의 지혜로 설탕이 렝켄의 몸속에서 배출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다. 렝켄과 부모는 서로의 말을 무턱대고 반대하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그렇게 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게 된다. 그 사건 이후 렝켄의 가족들은 요정을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렝켄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싶은 본능은 마법을 부리는 요정을 찾아가게 만든다. 부모의 몸이 자기보다 더 줄어들면 좋겠다는 단순하고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신나 한다. 결국 부모가 성냥갑 속에 담길 만큼 작아질 수도 있다는 말에 부모를 원상태로 돌리려 한다. 부모의 보호가 없이 혼자가 된 렝켄은 두렵고 무서운 상황과 마주한다.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부모와 렝켄은 자기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지 않게 되고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우여곡절을 겪지만, 요정에게 고마워하며 서로를 배려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동화를 읽으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순식간에 읽었다.
엄격한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어렵고 조심스럽다. 어릴 때부터 존댓말을 썼기 때문에 당연히 내 아이들도 경어를 쓴다. 심지어 우리는 부모님도 우리 부부도 서로 존댓말을 쓴다. 다른 가족들이 부모와 아이와 상관없이 평어를 사용하는 상황을 보면 당황스럽다. 부모와 자식의 경계가 없이 친구처럼 저렇게 말해도 되나? 그러나 친구처럼 다정한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어려워 속엣말은 못 하고 예절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존경과 위엄, 예의, 경우, 조심성... 이런 것들에는 익숙하지만, 친밀감, 애교, 허물없음, 표현하기 이런 것은 좀 어렵다.
내게도 마법의 각설탕이 있다면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마음을 조금 더 잘 표현하는 마법을 써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