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은 초록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나뭇잎이 마음마저 춤추게 했다. 그늘이 드리워져 시원해 보였다. 콸콸거리는 물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승아는 계곡에서 물장구를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물이 묻은 얼굴엔 이슬처럼 투명한 사랑이 방울방울 빛나고 있었다. 지수도 아이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소나기로 변했다. 제일은 얼굴에 쏟아지는 비에 몸부림치며 일어났다.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지없이 잠에서 깨어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양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심박사에게 새로 처방받은 수면제도 별 효과는 없었다. 끊임없는 민원실 업무는 매일 새로운 민원이 발생하여 중간 책임자인 그에게 큰 스트레스다.
그 와중에 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아내 지수가 우울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 제일은 죄책감에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지 반년이 넘었다. 레지던트를 하던 병원에서 만난 제일과 지수는 승아가 생기는 바람에 지수가 먼저 휴직하게 되었고, 제일은 마취과 전공의였는데 수술실의 피 냄새와 숨 막히는 긴장감, 시뻘건 피가 견딜 수 없어 병원을 그만두고 공무원이 되었다.
6개월 전, 그날은 팔월의 막바지, 휴가의 끝물이었다. 군청 민원실이라는 곳이 한가할 틈 없이 돌아가는 곳이라 휴가는 엄두도 못 냈다. 제일은 어렵게 공부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연로하신 부모님도 돌볼 겸, 고향 가까운 곳에 근무하고 싶어서 9급 공무원이 되었다. 10년 만에 7급 주사로 근무하는 H 군 민원실은 그야말로 싸움닭 같은 농부들을 상대로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들어주고, 업무 지침을 설명하며 보내기 일쑤였다. 딸 승아가 여름방학에 물놀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계곡이 있는 가까운 펜션으로 휴가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김 팀장에게 사정해 금요일 오전 업무를 마치고 오후 반차를 쓴 제일이 퇴근하려고 나서려는데 큰 소리가 났다. 퇴직 후, 귀농으로 비닐하우스에 블루베리 농장을 시작한 김 씨가 올 초 시설하우스 지원사업에서 떨어지고 한바탕 소동이 있었는데, 김 씨의 형님뻘이 되는 김 팀장이 후반기 추경에서 선정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해 둔 모양이었다. 하반기 추경에서도 탈락하였다는 말을 들은 김 씨가 민원실로 들이닥친 것이다.
“선정 조건을 다 맞추었는데 탈락이 된 원인이 무엇이오?”
“산업계 담당자한테 전화해 보겠습니다.”
산업계를 연결하니 시설하우스 지원사업 담당자가 출장을 갔다고 한다.
“나는 시설 투자비가 한정 없이 들어가서 속이 타들어 가는데 혹시, 아는 사람들끼리 나눠 가지는 것 아니요?”
“규정이 있고, 업무 지침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약속 시간은 계속 지체되고 있었다.
지수가 전화해서 자기가 승아를 데리고 예약한 펜션에 가 있을 테니 그쪽으로 바로 오라고 했다. 거머리 같은 김 씨의 횡설수설이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고, 미꾸라지 같은 김 팀장은 베테랑 제일에게 미루고 뒤에 빠져 있는 상황에 반차를 핑계로 민원실을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지수랑 승아가 먼저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지수는 늘 군청 일로 바쁜 남편을 대신해 승아의 뒷바라지를 하며, 10년 전에 신혼집으로 장만한 25평 아파트에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제법 똑똑한 승아의 학습도 가정에서 꼼꼼하게 챙기고, 남편의 식사도 거르는 법 없는 야무진 사람이다. 신경정신과 레지던트로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다 제일과 결혼했고, 지금은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것도 좋아서 돈은 아껴가며 쓰고, 아이를 알차게 키우자는 신념으로 승아에게 전력을 다하고 있다. 승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다시 근무할 계획이었는데 승아가 적응할 동안만 더 보살피기로 했다. 인근 K 시에 과학논술 영재 학원을 주 1회 데리고 다니고, 체험학습이나 견학도 다녀야 해서 소형차를 장만한 것이 가장 큰 사치라면 사치였다.
초등학교 1학년인 승아가 방학 동안 제출하는 숙제들이 방학에 만난 사람, 여행 간 곳 써 오기, 일기 등 체험학습 위주라 가족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예약한 오후 1시를 훌쩍 넘겨 2시가 넘도록 남편이 연락이 없자 보채는 승아와 먼저 출발할 결심을 한 것이다.
“엄마! 아빠도 꼭 오는 거지?”
“그럼! 아빠랑 통화하는 거 들었잖아. 그렇게도 좋아?”
연신 싱글벙글한 승아를 보며 지수도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