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농장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휴 Nov 08. 2023

말없이 자라는 것들


살감기로 열흘 넘게 심하게 아팠다. 1년에 한 번쯤은 꼭 그랬다.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몸이 나를 쉬게 하려고 주저앉히는 것 같았다.



아침에 정신이 들자마자 지끈지끈 두통이 시작된다. 만성 두통의 정체는 MRI, MRA, CT 등의 검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아 의사들 편의상 '신경성 두통'이다. 처방은 너무도 당연히 '신경 쓰지 말고 살아라'인데...



주섬주섬 일어나 대충 아침을 먹고, 농장에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몸을 재촉했다. 찬바람 쐬니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블루베리 나무들과 오랜만에 만난다. 그새 밑동이 더 굵어지고 잎도 많아지고 키도 커 보인다. 나무야 훌륭하다. 정말 잘했어. 나도 모르게 새순까지 올린 나무들이 기특하다.



통 안 가득 풀을 길러 놓은 화분들이 몇 개 보인다. 주인 없는 틈에 바지런히 자랐구나. 며칠은 또 이 풀들과 놈부림 쳐야 넘어가겠는데 머리가 다시 지끈거린다.



급한 화분의 풀들만 몇 개 뽑아 주었다. 기운이 없어 내일을 기약하고 할 수 없이 병원에서 주사까지 맞았다.



만물은 변함없이 자라나려는 속성으로 나아가는데 이 가을, 체력이 바닥나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힘을 낼 생각들을 궁리 중이다.



어떻게든 살아나려는 풀들의 지혜를 빌리면 나도 싱싱해질지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숭아밭 거미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