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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Apr 01. 2024

애매모호함으로 빚은 언어의 연금술

이장욱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문학과 지성사, 2021)중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읽고

   

  

이장욱 작가는 1994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에 작품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2005년 문학수첩 작가상에,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고백의 제왕』,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트로츠키와 야생란』,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천국보다 낯선』, 『캐럴』 등을 출간했다. 문지작가상, 젊은작가상,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다. - 작가 소개에서

    


소설의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을 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인물의 이야기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매개들, 인물의 서사를 쌓아가는 방식에 주목하여 읽으면 좋다. 주인공은 정귀보의 평전을 쓰기로 했으나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해 그만두려 하다가 정귀보의 시신을 본 뒤 자기 안에서 문장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는 설명을 시작을 서사를 따라가 보았다.      




정귀보는 별다를 것도 특별한 것도 없이 자랐다. 생활기록부에는 “성격 활달하지만 말이 없는 편”이라든가, “의외로 내성적이지만 인사성 밝음” 따위 알쏭달쏭한 평들이 있었다. 고교 3년 내내 같은 담임이었다. 모 대학 서양화과에 합격하는데 그림의 기본기나 완성도보다는 향후의 가능성에서 큰 점수를 받았다.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냈는데도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갈게.”(p153)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했다는 이 말은 정말 애매모호한 낭만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고독의 감정을 남겨 주었다는 말에 동의한다. 여자 친구는 스스로 찢겨 나간 한 페이지로 생각했을 것 같다. 그 친구는 사는 내내 자기 삶에서 정귀보가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함께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졸업 후 중견 가구 회사 계약직에서 착실히 경력을 쌓고 인정받아 정규직이 되지만, 돌연 회사를 그만둔다. 별다른 이유 없이… 공모전을 연 갤러리가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그해에는 지원작이 적었고 선정작은 유난히 많았다.      



“왜 이런 터치로 인물화를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관습적인 작품이라는 혹평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물이 살아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p157)   

  


(다소 아이러니한 문장들이 반복된다. 문장은 이쪽도 저쪽도 딱히 옹호하지 않은 채로, 양쪽을 모두 고려해 가면서 진행된다. 어떻게 읽으면 작가가 독자를 놀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으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또 책을 놓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작가의 능수능란한 말하기 재주에 매혹된다.)  


   

파주에 위치한 개인 미술관에 관리인 겸 도슨트로 들어간다. 가구 회사 사장이 소유한 미술관이었다. 박봉이었지만 정귀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총면적은 작았지만 이동식 벽을 설치해서 꽤 많은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었는데 미술품이 치워진 흰 벽은 길고 하얀 미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귀보는 미술관의 미로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귀보는 그 텅 빈 미로를 천천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같은 곳을 지나면서도 같은 곳인지 모르겠고, 다른 곳을 지나면서도 다른 곳 같지 않은 길을 그는 천천히 걸었다.”(p158)   

 

 

(어느 비 오는 날, 미술관을 걷는 화가를 상상하며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서너 줄 아래 “아아. 이것이 인생이요 세계가 아닌가.”라는 정귀보의 독백이 이어진다. 또 작가에게 당했다는 당혹감과 정귀보에 몰입되었다는 신비감도 함께 들었다.)

 

   

정귀보는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의 눈에 띄어 유명한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의 「21세기, 내일은 어디서 오는가?」 전에 초대받는다. 아시아에서 유일했다. 초대장을 받자마자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사고로 실종된다. 평단은 정귀보를 더욱 미화하고, 천재작가의 죽음은 큰 쟁점이 된다. 주인공은 평이한 정귀보의 삶을 평전으로 쓰는 것을 계속 망설여오다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바꾼다.


  

“나는 뜻밖의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멈췄던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귀보의 시신을 직접 볼 수 있다면 평전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신은 정귀보에 대한 기나긴 글의 유일한 출발점일지도 모른다.”(p177)   

  


(그의 끝에서 시작을 찾겠다는 주인공의 당참과 애매모호함이 또 부딪힌다. 초등 아이들한테서 120일 전에 죽은 정귀보를 두고 “그 아저씨가 해변에서 걸어서 나왔다.”라는 말을 듣고 아이들이 공포감 때문에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시신은 아무런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말이 더 환상적이고 다분히 동화적이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간 후에, 그가 남긴 흔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연대순으로 연보를 적으면 한 페이지로 족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그의 행보를 적든 업적을 적든 한 사람의 인생을 남긴다는 대목에서 내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남길까도 중요하고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 위 리뷰는  [YES24] 4월 둘째 주 "주간우수리뷰"에 선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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