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헤이머 산문집 『두더지 잡기』(카라칼, 2022)를 읽고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이라는 부재를 달았다. 시인, 정원사, 전직 두더지 사냥꾼이라고 소개된 마크 헤이머는 10대 초반부터 50여 년을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다. 산문과 시가 번갈아 나오는 책이다.
정원사이면서 생계를 위해 두더지를 잡았던 작가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삶에 조용히 스며든 사람이다. 두더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애정에서 나왔다. 세계적으로 서식하는 두더지를 소개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두더지 잡기를 했지만, 자연과 생물을 사랑하는 그는 두더지 잡기를 그만두고 글을 쓴다.
자연 박사, 토양 박사쯤의 대명사를 붙여도 될 만큼 지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위대한 자연의 자생력은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과 닮았으며, 사람이 자연의 생태를 따라서 살아야 함을 알려 준다. 숲에서 살면서 일기를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었을 때처럼 편안하고 자유롭고 다정한 위로를 받았다.
「프롤로그」에서 “자연에 대한 열정을 부추기는 삶을. 자연의 실용적 아름다움과 난폭하고 잔인한 에너지에 대한 열정, 심지어 자연의 부패에 대한 열정까지도 북돋우는 삶을. 그 삶은 세계를 더 넓게 보는 시야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준 성찰적인 삶이었다.”
「길 위의 신사」에서 “나는 내가 잘하는 일, 즉 걷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내가 즐거워하는 일, 즉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관찰하고 그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들과 얽힌 복잡한 세계보다는 자연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삼을 선택한 사람이다.
「흙과 집」에서 “나는 땅에 속해 있으며, 흙을 사랑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고, 나는 그것이 내 피부에 닿길 바란다. 걷는 것, 가능하면 맨발로, 맨손으로, 맨머리로 걷는 것은 내 기분을 좋게 해 주고, 내 몸으로 대기와 땅을 잇는 기분을 들게 해 준다. 그곳은 살아가고 자라나는 모든 것들이 최종적으로 이르게 되는 곳이다. 모든 것들의 먹이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자연을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땅으로 녹아든 밤」에서 “내가 더 조용할수록, 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물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내가 그곳에 있지만 위협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더 많은 잡음을 낼수록, 자연은 더 조용해진다. 침묵을 유지하면서 나는 내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수역의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고, 야생동물이 없는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주는 잘 관리된 솔숲의 침묵을 느낄 수도 있었다.”며 자신이 자연에 침해되지 않도록 자연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있다.
「걷는 사람」에서 “그곳에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생명이 있을 것이며, 무언가에 매달려 애쓸 일은 전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위와 살덩이 위에서 일어나는 바람과 물의, 이 끊임없는 선회는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만든다. 그곳에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들을 만들었고, 자연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다. 이는 나의 불가피하고 개인적인 생태계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생태계가 있을 테고, 다만 그것들은 서로 비슷할 것이다. 치유란 그저 변화, 받아들임에 적응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모두 평범한 일이다. 우리는 이곳에 와서 자라나고, 그러고는 다시 점차 사라져 간다.”라고 적고 있다. 자연을 떠난 그의 일상이나 생각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는 자연에서 태어났고, 자연에서 자랐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채 사는 것 같다.
「두더지들 2」에서 “선택은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닌 듯 보였고, 나는 삶이 그냥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기 시작했다. 그러는 편이 훨씬 기분 좋게 느껴진다. 나는 그것을, 그저 날아와 둥지를 틀고 먹이를 먹고 새로운 새를 낳은 새들로부터, 그리고 그냥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먹이를 먹고 새 고슴도치를 낳은 고슴도치들로부터 배웠으며, 그들은 모두 죽어서 제때 진흙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일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살면서 이루고 싶은 일들이나 이루지 못한 일들 앞에서 안달복달 속을 끓이는 그런 행위들이 무용하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순리적인 삶을 받아들이면 삶이 평안해진다고 일러주는 것 같다.
“나는 내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자연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고, 그것과 사랑에 빠져 있다. 나는 그것이 늘 하던 대로 행동할 거라고 믿으며, 그것이 위험할 거라고 예상한다. 자연은 우리의 안전에 신경 쓰지 않는다. 편안하고 안전하기 위해 나는 알아차리는 법을 배웠고,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잠재워야 한다. 뭔가가 잘못되면 내 몸이 그렇다고 말해줄 거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하고, 혼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적었다. 그는 자연에 온 정신과 마음을 기울이는 것처럼 자기 몸과 마음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다.
「망가진 것들」에서 “불교도들은 삶이 슬픔으로 가득한 것이며 슬픔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민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슬픔과 기쁨을 모두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들판에 존재하는 것, 매나 고슴도치처럼 존재하는 것에는 기쁨이 존재한다. 그것에는, 우리가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 가는 여정에는 슬픔 또한 존재한다.”라고 적었다. 나는 불교 서적에서 위안을 많이 받는다. 삶이 온통 행복이고 아름다움뿐이라고 했다면 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삶 속에 슬픔이 있다는 말을 새겨듣는다.
나도 함께 숲을 걷고 숲의 소리를 듣고, 숲을 보고 있었다. 이름 모를 꽃과 벌레를 하늘과 구름과 온갖 자연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인생을 살아 본 지혜로운 어른이 한 말씀 한 말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가 잠언처럼 꼭 들어야 할 말들처럼 따듯한 위로로 다가왔다.
나도 70쯤 나이를 먹게 되면 세상의 이치들을 알 수 있을까? 담담한 목소리로 삶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들도 무뎌지고 잔잔한 감정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정원사로 살아온 그는 자기 삶의 바탕들인 흙과 자연을 무한히 사랑한다. 내 삶에도 그토록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이 있을까를 돌아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