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식 동시집 『바람도 키가 큰다』(아침마중, 2025)를 읽고
「시인의 말」에서
“그림 없는 동시를 이렇게 깊은 생각으로 읽으면 머릿속에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지요. 한 편 한 편 이렇게 고운 마음으로 읽고 읽으면 가슴속에 예쁜 그림이 새겨지지요. 상상력이 쑥쑥 크지요.”
이번 동시집은 삽화 없이 색지로 구분하여 4부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동시에 몰입하며 독자 스스로 삽화를 그릴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을 독자에게 통째로 내주었다. 동시와 삽화가 함께 있는 동시집의 틀을 깨고 새로운 방식의 동시집을 제안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찬성하는 측면이 있다. 기대를 품고 마음을 붙잡은 동시들 몇 편을 만나보자.
달을 살짝
감추어 간다.
가다가 가다가
어느
산골짜기
자연인 혼자 사는 외딴집
어두컴컴한
뜰 위에
달을 슬그머니
놓고 간다.
― 「구름이」 전문 (p20)
자연물을 매개로 동심을 전달하는 마음은 이토록 따뜻하다. 구름이 달을 데리고 가는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삽화가 없어도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작가의 작전은 대성공이다. 자연인이, 외딴집이 외로울까 봐 슬그머니 달을 놓고 가는 세상 착한 구름이를 만났다.
풋고추 서너 개
애호박 하나
파 마늘 네댓 뿌리
상추 몇 잎
쌈 배추 한 포기
주고 가신다.
― 한번 잡숴 봐!
마른 가뭄에
메마른 세상에
밭 한 뙈기
선뜻
내주고 가신다.
― 「이웃 할머니」 전문 (p22)
텃밭 장터가 내 집으로 옮겨 온 것 같다. 밭 한 뙈기를 선물 받은 것 같은 넉넉하고 푸근한 인심이 전해진다. 세상은 참 살만한 곳이라는 걸 한 편의 동시로 보여주는 정다움이 느껴진다. 싱그러운 채소가 가득한 바구니를 든 이웃 할머니와 함박웃음으로 감사함을 전하며 바구니를 건네받는 우리 할머니의 모습을. 역시나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 본다. 분명, 채소를 건네는 이웃 할머니의 웃음이 더 커 보인다. 주면서도 더 행복한 이웃 할머니다.
엄지 검지 두 손가락
시계 손가락
가끔
손가락 하트 날리며
날마다
해를 돌려주지.
달마다
달력을 넘겨주지.
― 「시곗바늘」 전문 (p50)
시곗바늘이 멈추면 시간도 세상도 멈추는 것 같다. 제대로 돌아야 하루 두 번 꼬박꼬박 손가락 하트도 날리며 해를 돌리고 달력을 넘겨주는 시곗바늘이 된다. 세상을 바르게, 정확하게 살아야 사랑도 만들어 진다는 속뜻이 들어 있어서 시곗바늘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알 것 같다. 말없이 자기 할 일을 해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엄지와 검지로 자꾸만 손가락 하트를 날리는 시곗바늘을 떠 올려 본다.
꿀벌이
꽃 속에
들어가더니
한참 동안 귀엣말
듣고 나온다.
천연 꿀 만드는 법
천연 향기 만드는 법
배우고 나온다.
나누며 베풀며
사는 법
직접
체험하고
나온다.
― 「체험학습」 전문 (p62)
꿀벌이 꽃의 꿀을 따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 꽃이 벌에게 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팁들도 나눠 준다고 말한다. 삶의 중요한 것들을 묻고 답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작가의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온 경험에 의한 철학이다. 정보를 나누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을 배울 수 있는 동시다.
세상에나! 첨 봤다야!
시끌벅적한
놀이터
뛰노는
저 아이들
새소리보다 더 좋다야!
아파트
높이 열린 창
할머니 귀다, 쫑긋 귀.
― 「이사 온 날」 전문 (p84)
놀이터가 꽉 차도록 아이들이 뛰어노는 상상을 해 본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모습이다.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은 놀이터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놀이터보다 학원에 가야 하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게임에 열중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놀이터가 외로운 지경이다. 아이들 소리를 반가워하는 할머니 마음도 알 것 같다. 휴대전화보다는 놀이터에 진짜 재미있는 일들이, 정다운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다.
『바람도 키가 큰다』동시집을 덮으며 내 마음에 여러 장의 풍경이 남겨졌다. 하늘과 별과 구름, 바람, 호수, 낮달 등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할머니, 친구, 아빠 등 따뜻한 그림들을 그렸다. 그 누구도 잘 못 그렸다고 나무라지 않는다. 작가의 시가 좋아서 떠올려지는 그림도 자연스럽고 따듯하다.
소통하며 나누고 살자고 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정말 따뜻하고 좋았다. 책 속의 활기찬 에너지가 바람을 일으키듯 팔랑팔랑 동심을 부채질한다. 내 상상력을 높이는 그림 실력도 키가 쑤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