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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Nov 01. 2019

14일간의 유사 퇴직

결국 1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팀이 해체되었다. 팀장은 면직되고, 팀원들은 10여 개 팀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좋게 이야기하면 업무 전환시켜준 것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조각조각 해체하여 버린 것이라고 할까. 그 후로 보름 동안 한 사람 한 사람 새로 배치받은 부서로 떠나가고, 오늘 나랑 후배 둘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자매사 전출 신청자라서, 이곳 회사에서의 현업 배치가 유보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내 위로 보고를 할 상사가 없는 이 상황은 '유사 퇴직'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회사를 나온 이후에 극심한 공허함을 느낀다고 하는데, 비슷한 느낌이다. 일없는 하루 8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떠나는 동료들과 아쉬움을 나누는 티타음을 가지고, 온라인 교육을 받고, 주변 정세를 살피고 살피어도 시간이 남았다. 결국 이번 주부터는 책을 읽고 있다!


오늘 읽은 책은 '나는 치사하게 퇴직하고 싶다'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에 공감 가는 글귀가 있었다. 사람들이 퇴직을 하며 하게 되는 후회 5가지인데,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일만 프로 매치가 되더라. 역시 유사 퇴직 체험 중인 게 맞는 것 같다.


떠날 때 후회하는 다섯 가지

하나,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했다는 후회
둘, 성실하지 못했다는 후회
셋, 열정을 가지고 일하지 못했다는 후회
넷, 관계에 대한 후회
다섯, 비전에 대한 후회.



왜 사람은 지나고 나서야 후회를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특히 지난 1년 반이 후회가 되었다. TDR을 마치고 박 팀장의 Call을 받지 말 것을, 이 팀의 말로를 알고 있었는데, 왜 그 제안이 독주가 될 것을 알고서도 따라왔을 까. 돌아와서는 왜 그토록 자신 있었으면서 최선을 다하지도, 열정을 불태우지도, 성실하지도 않았을까. 주변 환경만을 탓하며 지금의 우리 조직을 더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후배들과 관계를 더 살갑게 가져가지 못했을까. 결국 이런 사태를 왜 막지 못했을까...

하지만 보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후회도 계속하니 지겨워지기도 하였고, 속으로만 하는 후회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이번의 실패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20년 동안 내가 걸어온 길은 위험을 최소화하며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 뿐이었다. 결국 성공확률은 높았지만 (실패 경험은 적고) 얻는 이득이 갈수록 줄어 갔다. 그리고 이제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 들고 있는 패가 바닥이 났다. 디스플레이도 망했고, 내 학위 방패도 낡아 구멍이 났다. 이렇게 아무 패도 없이 필드에 나서본 적이 없어 적잖게 겁이 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위기가 기회를 만든다'라고 하니, 기회가 올 때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겠다.


동영상 강의도 많이 듣다 보니, 그럴싸한 말들도 많이 나온다. 오늘은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에 대한 강의를 보았는데, 멋진 사람이더라. 엘론 머스크의 리더십에 대한 특징을 논할 때 이런 점이 강조되었다.


눈앞의 문제에 전력을 기울이는 능력,
미래를 향해 에너지를 적절히 배분하는 능력

리더에게 주어진 역할은 지금 필요한 것과 먼 장래에 필요한 것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어느 임원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회사가 원하는 일에 49%의 에너지를 쏟아라. 나머지 51%에는 너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라. 아, 나는 왜 이런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을까. 그동안 나는 회사라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내게 주어진 미션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자세라 생각했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또한 내 역할과 책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성실히 수행하고 나니 남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자기 계발과 미래 진로에 대해서는 머릿속으로만 앞으로 어떻게 하나를 상상했지, 그를 위한 실제적 준비는 단 한 가지도 한 것이 없었다. 결국 준비 없는 자가 위기가 닥쳐오니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이다. 이게 딱 지금 현실인 것 같다.



다시 퇴직 체험 이야기로 돌아와서,

10월 초에 회사에서 명예퇴직 신청 소문이 돌았을 때 상당히 마음이 동요되었었다. 9월 말쯤에 이미 이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이왕 회사를 떠날 것이면 회사에서 주는 희망퇴직금이라도 받고 나가는 게 나은 것 아냐?"라는 생각을 했었다. 한 달도 안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초딩스럽단 생각이었다.

회사가 주는 소속감과, 내 자리가 내게 주었던 자존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간과한 생각이었다. 명함에서 회사 이름 하나를 지우면 아무것도 아닌 종이쪽지가 된 다는 사실을 잊고 한 생각이었다. 존버 하는 선배들을 멸시하며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자만에 가득 찬 생각이었다. 나 또한 별로 다를 것 없는 '그들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다음 주쯤이면 전출자에 대한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한다. 합격과 불합격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길이 열리게 되겠다. 합격하게 된다면, 새로운 직장,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낮은 자세로 그러나 절실하고 독한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 나 때문에 고생하게 되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불행히도 남게 된다면, 내 결정에 대한 책임은 지어야 할 것이다. 배신자라는 주홍글씨를 지울 수는 없겠지만, 바깥은 더 지옥이니, 이곳이 전쟁터이고 나는 하자가 이미 새겨진 병사여도 훗날을 도모하며 살아남아야겠다. 실패가 기회가 될 것을 믿으면서 살아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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