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텐트 캠핑족일 때는 극동계나 극한계 캠핑이 늘 어려웠다. 얇은 텐트 한 겹으로 무더위나 혹한 추위에서 우리 가족을 지키려면 엄청난 짐을 준비해 가야 하는데 이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슬슬 날씨가 더워지고, 아이들 방학도 다가와서 여름철 캠핑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인데, 와이프가 금요일에 휴가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귀띔을 주었다. 요즘 서로가 바쁜 시즌이라 기회가 나면 떠야 하는 법. 금요일 오후 휴가를 내고 대충 짐을 꾸려서 출발했다. 언제나 가는 강원도로!
금요일 오후에 서울 수도권의 정체야 피할 수 없지만, 구리를 벗어나면 꽤나 한가롭게 운전을 할 수 있다. 카라반은 어차피 주행차로에서 80km 정속 주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크루즈 모드에서 무념무상으로 달리는 편인데, 이럴 때는 운전도 피곤하기보다는 힐링이 될 수 있단 점에 늘 놀라곤 한다.
오랜만에 캠핑이라 견인차도 깨끗이 세차를 해주었다. 견인차나 카라반이나 연식이 오래된 녀석들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소중한 존재들이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질 수밖에 없으니 나올 수 있을 때는 한 번이라도 더 나오려고 노력 중이다.
재작년에 몇 달 동안이고 내내 잿빛이었던 시절과, 작년에 두 달 동안 비가 내렸던 시절들에 비하면 올해는 야외 활동하기에는 아주 좋은 해인 것 같다. 문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실 지난주는 수도권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되고, 전체적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때문에 이번에 캠핑을 간다고 할 때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시기도 했다. 여러 상황으로 이번 캠핑의 미션은 자체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실현!
오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캠핑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늘 오던 곳이라 자리 정리도 고민할 것 없이 뚝딱이다. 4시간 정도 운전을 하니 피곤하기는 했지만, 숲이 주는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많은 부분이 해소되는 것 같다.
이 맛에 온다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온 원두를 갈아 아이스커피를 한잔 하고, 구운 달걀과 옥수수로 요기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 이곳 캠핑장이 왜 이리 사람이 없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지만, 이번 주도 전세 캠은 확정인 것 같다!
밤에 구름이 많아 별이 안보이더니, 다음 날 아침부터는 비가 내렸다. 어닝을 펴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날이 개기를 기다린다. 장마는 도시 속에서는 습하기만 한 날씨지만 산속에 있을 때는 똑같은 습기도 피톤치드가 함유되어 그런지 거부감이 없어서 좋다.
어른들이야 우중 캠핑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재앙이다. 이럴 때 무료해하는 아이들을 달래기에는 보드게임 보다 좋은 것도 없다! 부피가 크기는 하지만 매번 보드게임 한 두 개는 꼭 가지고 나오는 이유! 요즘은카탄에 두 아이가 모두 흠뻑 빠져 있는데 한판에 30분이 넘게 걸려서 시간 보내기에 아주 제격이다.
점심으로는 간단하게 바질 크림 파스타를 해서 모닝빵과 함께 먹었다. 간단할 수 없는 바질 크림 파스타를 간단하게 하는 법 : 면은 전자레인지에 7분 돌려 삶아주고, 뜨겁게 달군 웍에 양파와 버섯만 올리브 유와 함께 살짝 볶다가, 시판 파스타 소스와 삶은 면을 넣고 휘리릭! 파스타 면인 줄 알고 옥수수 면을 들고 온 게 치명적 실수였지만, 밖에서 먹는 점심은 분위기가 다 해줬다.
오후가 되니 보란 듯이 날이 개었다. 언제 또 비가 올지 모르니, 재빨리 채비를 하고 동해 바닷가로 이동했다.
양양에서 갈 수 있는 해수욕장은 새 군데 정도이다. 낙산사 앞에 있는 낙산 해수욕장, 솔비치 앞에 있는 송전 해수욕장, 그리고 그 아래쪽에 동호 해수욕장. 우리는 그나마 가장 덜 알려진 동호해변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출처 : 연합뉴스
20분 정도 걸려 도착했는데 해수욕장 입구에서부터 차량이 밀려있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바닷가 입구는 발열체크를 해주시는 분 덕분에 줄을 서 있고 그 뒤로 해변가에는 온통 오색찬란 파라솔과 해수욕을 즐기려는 수많은 사람들! 어릴 적 여름에 늘 나오던 그 뉴스 풍경이네. 숲 속에 우리끼리만 있어서 몰랐는데, 바닷가는 극성수기였다.
결국 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문득 사람이 거의 없는 해변가를 발견했다. 사실 이곳도 동호 해변의 연장선인데, 파라솔이 없는 구역이어서 그런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우리는 차에 그늘막과 의자를 챙겨 왔기에 망설임 없이 피크닉 장소를 셋팅했다. 이 또한 카라반 캠퍼의 큰 잇점이라 생각된다. 본진은 고이 놔두고 서브로 이동식 진지를 꾸릴 수 있는 유연성이랄까.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넓은 백사장, 그리고 폼나는 표지판까지 더해서 사진을 찍으니, 여기가 꼭 남태평양의 유명한 비치인 것 같다. 왠지 우리만의 아지트를 찾은 기분에, 와이프랑 둘이 사진 보며 킥킥댔다.
우리 셋 뿐인 해변
자리 셋팅을 마치고, 와이프는 늘 그렇듯 망중한을 즐기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모래놀이를 하러 해변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모래놀이를 한 건 2년 전에 베트남 다낭이었던 것 같다. 옛날 생각에 그때 사진을 다시 찾아보니 그 사이에 아이들이 정말 훌쩍 커버렸다. 코로나가 뺏어간 지난 1년이 참 아쉽고 야속하다.
패들보트 타시던 멋진 서퍼님
동호 해변은 원래 서퍼들에게 입소문이 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닷가에도 서퍼들이 주로 있고 군데군데에서는 강습도 진행 중이었다. 와이프가 체력을 좀 차리게 되면 같이 꼭 한번 배우고싶다고 했다. 젊을 적에는 누구보다 활동적이었던 그녀가 아이 둘을 낳고 워킹 워먼으로 15년을 살다 보니 이런 여유와는 정말 많은 거리를 두고 산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삶을 되찾아 오자고 해변에서 도원결의 했다.
해변 앞에 있는 카페가 있는데 너무도 착한 가격에 맛있는 커피를 팔고 있었다. 머피의 반대 법칙의 날인가? 모든 게 완벽한 하루구나! 정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한나절을 보냈다. 급히 와서 수영복도 준비 못했는데, 아이들이 그걸 상관할 리 있나.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손가락이 퉁퉁 불고 나서야 나왔다.
내 어린 시절 동해안 바닷가의 추억은 거리마다 가득한 횟집들과 다소 무섭게 호객행위를 아저씨들.. 길가에 가득했던 쓰레기 등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동해안은 어떠할까. 근사한 커피숍과 잘 정비된 거리, 깨끗한 화장실과 공용 무료 샤워장까지 구비된 동호 해변을 보자니 어쭙잖은 감회가 올라온다. 10년 전에 캘리포니아 바닷가에 처음 놀러 갔을 때 여유로운 미국인들과 그들의 잘 갖춰진 인프라가 그렇게 부러웠는데, 이제는 이곳도 충분히 아름답고 쉼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내가 나이가 든 걸까, 우리나라가 살기 좋아진 걸까.
해질 무렵이 돼서야 아이들을 설득해서 뭍으로 나왔다. 무료 샤워장에서 바닷물과 모래를 털어내고, 젖은 옷은 갈아입힌 후 다시 우리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의 저녁바닷가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다. 정말 이번 캠핑은 눈호강 실컷 한다.
저녁은 야채를 곁들인 통삼겹살 바비큐 구이를 준비했다. 캠퍼 구이 요리의 끝판왕이라는 훈연 구이인데, 젖은 사과나무를 숯과 함께 넣고 오븐에서 구워내는 요리이다. 오븐에 넣어둔 후로는 고기를 뒤집거나 할 일이 없어 오히려 직화 구이보다 편한 장점이 있는데 문제는 요리 시간이 2시간이나 걸린다는 점! 결국 9시가 넘어서야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기다린 보람은 있는 맛이었다!
말 그대로 존/맛/탱
식사 후에는 자연스레 이어지는 불멍 타임. 5월까지만 해도 밤 날씨가 쌀쌀해서 모닥불 앞에 다닥다닥 모여 앉았었는데 이제는 불길을 조금만 느껴도 더위가 훅 느껴져서 멀치감치에 놓고 감상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신 약간 허전하니 테이블에는 이쁜 이소 랜턴 하나 켜 둔다. 와이프와 오랜만에 이란 저런 이야기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캠핑을 하면 자연스레 가족끼리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셋째 날 아침. 쨍하게 파란 하늘이 하루 더 묶고 가라 하지만 일요일 오후의 지독한 교통 체증을 생각하니 빨리 철수하는 게 답인 것 같았다. 와이프와 아침에 모닝커피 간단히 하고 짐을 챙겨 돌아왔다.
처음으로 가본 여름 성수기의 동해 바닷가 캠핑이었는데,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만족도 높은 여행이었다. 모기와 개미의 무차별 공격과 변덕스러운 날씨, 몰려드는 인파.. 세 가지를 잘 막아내는 것이 동해안에서의 여름 캠핑에서는 관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