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가 내게 한 질문이 아니었다. 출발 하루 전까지 내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한 내용이다. 추위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카라반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이 대부분은 카라반 밖에서 조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춥고 귀찮았다. 모처럼 12월 마지막 주에 휴가를 낼 수 있었는데, 와이프는 연말 마감이 겹쳐서 출근을 해야 한다고 하니, 두 아들의 독박 육아는 내 몫이 된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라도 더더욱 출발함에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들의 컴플레인에,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16번째 알빙기이다.
사실 겨울 캠핑은 여름 캠핑보다 고민할 변수가 많다. 특히 강원도 쪽은 영하권의 날씨에 카라반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수도관의 동파 사고가 잦은 편이다. 수전이 터질 경우 카라반 바닥이 물바다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물을 안 쓰자니, 카라반 시설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니 안타깝게 된다. 우리 같은 경우는 카라반이 양양에 있다 보니, 캠핑 출발 전 사전 점검을 할 수도 없는 신세, 이번에 처럼 불안함을 안고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다.
12월 31일 아침. 연말 마감이라 휴가를 못 낸 와이프는 출근을 시키고, 아들 둘을 데리고 오랜만에 3 부자 캠핑을 떠났다. 3시간 정도 걸려서 우리의 아지트에 도착하였다. 카라반 상태를 살펴보니 태양광 충전도 잘 되어있고, 보일러도 빵빵하게 잘 가동되었다. 다만 하수가 얼어붙어 내려가지를 않았는데, 이전에 철수하면서 청수 통은 다 비우고 왔지만, 하수 배관에 물이 조금 남았던 모양이었다. 수전 터지지 않은 게 어디냐 하며 감사히 여겨야 했지만.. 이 또 한 처음 겪는 일이어서 사실 엄청 불안해하였다. 다음 날 낮에 드라이기로 하수 배관을 10분 정도 녹여 주니, 물은 다시 잘 내려갔다. 모든 건 다 해결되기 마련인데, 급한 건 사람의 마음뿐인 게다.
처음에는 카라반 만으로도 감지덕지 였는데, 1년 정도 지나고 보니 아이들과 분리된 와이프와 나만의 공간이 좀 필요해졌다. 결국 카라반 앞마당에 쉘터를 다시 하나 짓게 되었다. 캠핑 생활의 로망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도 사실 비슷한 부류인 셈. 다만 텐트로만 생활하는 캠퍼 시절보다는, 훨씬 여유롭게 쉘터 설치와 철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좋았다. 생각보다 쉘터가 커서 그 공간에 이것저것 채워 넣느라, 주머니가 가벼워짐은 좀 문제지만..
1월 1일 새벽에 와이프가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와서, 우리는 다시 완전체가 되었다. 큰 녀석이야 나랑 캠핑을 자주 다녔으니 엄마가 있던 없던 개의치 않았지만, 둘째는 아직 어려서인지 엄마가 오고 나서야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는지, 연신 방긋방긋이다. 서울 생활에서는 사실 잘 느끼지 못했던 끈끈한 가족애를 강원도에서 확인하게 되네.
이번 캠핑에서는 둘째 날의 캠프화이어가 가장 인상 깊은 시간이었다.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21년을 마무리하고, 새해 소원을 빌고, 새해의 다짐을 나누었다. 조금 더 행복해 지자는 와이프와 나의 소원, 새로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으면 좋겠다는 큰 아이의 바람, 곧 이별하게 될 이모할머니와 자주 만나게 해 달라는 막내의 아이다운 마음. 모두 남김없이 이루어져서 22년도가 행복했음 하는 바람이었다.
카라반 뒷마당에 큰 공터가 있는데, 평소에는 숲이 울창하여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겨울이 되니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반대로 하늘이 뻥 뚫려 버렸다. 이날 유독 날씨가 맑아서 정말 눈이 호강할 정도로 별구경을 실컷 하였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별이 있었구나는 생각. 다음에는 망원경을 들고 와서 아이들과 같이 별자리 탐험을 해봐야겠다.
추운 겨울날 굳이 집 밖에 나가서 생활을 왜 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인생의 소소한 재미를 찾기 위해서라고.
루틴 한 일상이 배어있는 집안에서의 주말은 늘 늘어지기 마련인데 반해, 밖에서의 생활에는 내 감각들이 조금은 민감하게 살아나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는 하늘이 좋고, 갓 구운 크루아상이 좋고, 도구가 마땅치 않아 어설프게 내린 커피도 맛이 최고이다. 캠핑 옆 동네에서 만들어온 도자기 몇 점을 가지고 3단 쉘프를 꾸며 놓으니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다. 평상시의 힘듦, 바쁨, 찌듬의 감정이 지배하는 서울 살이에서는 이런 소소한 행복이 곁에 있다 하여도 느낄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모두 STOP! 하고 이렇게 잠시 떠남의 효과는 계절과 상관없이 유효하다.
여름 내내 기운차게 흘러내리던 캠핑장 뒷 계곡이 추운 날씨에 다 얼어붙었다. 눈이 오지 않아서 아쉬워하던 아이들이 놀 거리가 생겼다고 반색한다. 별거 없는 얼음판 위에서 한 시간 남짓을 정말 열심히 뛰어놀았다. 다음번에 올 때는 얼음 썰매도 챙겨 와 봐야겠다. 캠핑장에 아예 한 달 장박을 끊고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