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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Jan 26. 2022

겨울인데 이글루 하나쯤은 지어야죠?

겨울동화로 시작했다 리얼다큐로 끝난 슬픈 이야기

아이들과 캠핑을 가기로 한 주말이 다가올수록 영 마음이 당기지 않았다. 주말 캠핑은 보통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출발했었는데, 와이프가 금요일 야근이라 어쩔 수 없이 토요일 아침에 출발을 해야 한다고 하니, 도착했을 때 피곤함이 눈에 훤했다. 일요일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금요일 퇴근길에 뒷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지렁이로 때우기는 했지만, 카라반을 끌고 겨울철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데, 운전의 부담감까지 더해졌다.

 

이럴 때 누구 한 명만 거들어 주면, '에이 안 되겠네' 하고 집에 눌러앉을 상황이었는데, 하필 이번 주는 가족 모두가 캠핑 가기에 들떠 있다. 어린 동심에 상처 주는 아빠는 되지 말자 다짐하고, 토요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쌌다. 단, 너무나 귀찮으니까, 세상없을 미니멀 캠핑 콘셉트로. 와이프와 난 속옷 한벌씩만 챙겼고, 아이들은 갈아입을 옷 딱 한벌. 먹을 것은 너구리 4개와 계란 2알만. 나머지는 다 현지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그렇게 배낭 한 개에 옷과 음식만 챙겨 넣고, 아이들을 깨워 차에 태우고 7시에 출발을 했다.


여행이란 묘한 것이, 그렇게도 귀찮았던 기분이 확 뚫린 고속도로를 타면서 살살 녹아내린다. 와이프와 주중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가다 보면 3시간도 금방이다. 10시가 조금 넘어 캠핑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전날까지 캠핑 갈까 말까를 너무 잰 덕에 캠장님께 방문 사실을 알리지 않았네. 일단 들어가서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캠핑장 문이 잠겨 있다. 부랴 부랴 캠장님께 전화를 드려, 사정 설명을 하고 '내가 문을 열고' 입장했다. 캠장님 조차 없는 레알 전세 캠이 벌어지겠구나!


주초에 양양에 눈 소식이 있었고, 캠핑장에 도착할 즈음부터 산기슭에 눈이 쌓여 있어 기대를 했는데, 캠핑장은 온통 눈밭이었다. 심지어 일주일 내내 아무도 오지 않았는지 사람 발자국 하나 없는 청정 지역이었다. 이런 행운이! 올해 내내 설경을 못 보나, 아쉬워했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푸나보다. 오길 잘했다고 넷이서 한껏 들떠서 신나 했다.  


점심을 먹고, 스키복에 장갑에 모자까지 풀 무장을 시킨 두 아이와 함께 캠핑장 뒤에 있는 계곡으로 나가 보았다. 지난여름에 신나게 물놀이를 했던 그곳이, 온통 눈밭이 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보는 눈과는 차원이 다른 보슬보슬한 솜사탕 같은 눈이었다. 그리고 눈 아래로는 계곡물이 두텁게 얼어붙은 빙판이 펼쳐져 있어 썰매 타기에도 너무 좋아 보였다. 분명 눈이 오고도 며칠 그대로 있었을 텐데, 마치 어제 온 것 같은 '고퀄리티' 눈밭에 '오직' 우리 가족뿐이라, 모두들 신나서 눈밭을 헤치고 다녔다.

한참을 눈덩이를 뭉치며 놀던 아이들이 이번에는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계곡 물이 여러 번에 걸쳐 얼어붙었는지, 10cm 정도로 고른 두께의 판 얼음들이 끝도 없이 깨져 나왔다. 판 얼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글루를 짓기로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글루가 얼음으로 짓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유튜브나 인스타에 나오는 이글루 짓기는 전부 눈으로 만드는 거였다. 하긴 이렇게 많은 얼음을 공급할 수가 없을 테니 방법이 없을 테지. 그렇게 내가 알기로는 국내 최초, 자연산 얼음으로 만드는 이글루 제작이 시작되었다.

우리 세명이 들어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전체 면적을 잡고, 한층 한층 얼음을 쌓아 올렸다. 크게 나오는 얼음들은 돌도끼와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작게 잘라 벽돌로 가공하였다. 큰 아이가 얼음을 캐오고, 작은 아이가 얼음을 가공하고, 내가 건물을 올리는 3인 분업 체계로 공정을 착착착 진행시켰다. 특히 큰 녀석이 재미가 있었는지, 판 얼음이 나올만한 곳을 '채굴장'이라고 하면서, 눈썰매로 부지런히 운반해 왔다. 겨울 방학 내내 집에서 뒹굴뒹굴만 하던 녀석인데, 캠핑 나오니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운동을 하니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렇게 오후 내네를 채굴 - 운반 - 벽돌 제작 - 쌓기를 반복했다. 올리는 중간중간 천연설을 뭉쳐서 시멘트처럼 얼음 사이에 넣어주니 제법 단단한 이글루가 되어 갔다. 저녁 쯤되니 15층 정도를 쌓았는데, 그래 봐야 어른 무릎 정도 높이가 된 것 같다. 한나절 재미있게 놀았다 싶어,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는데, 아이들이 너무 진지하다. 밤사이에 녹아내리지는 않겠냐, 완성을 해야 하는데 내일 집에는 언제 가느냐.. 슬슬 이 놀이의 마지막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일단 계곡에서 물을 떠 와 얼음 사이사이에 뿌려서 얼어붙게 해 주었고, 나머지 작업은 내일 생각하자 하고 아이들을 달래서 철수하였다.


고된 노동 후에 먹는 밥은 얼마나 꿀맛 이던지! 아이 둘과 함께 저녁 한상을 게눈 감추듯 후딱 해치우고, 모닥불 앞에서 노래 부르고, 별구경도 하면서 행복한 밤을 보냈다. 코로나로 늘 눈치 보며 고통받는 이 시절에, 주변 눈치 전혀 볼 필요 없이, 마스크가 어디 있지.. 챙길 필요 없이, 이렇게 편하게 지낸 것이 도대체 언제일까. 정말로 자유롭고 편안한 저녁 시간이었다.

카라반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늘 정겹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와 눈 풍경이 제법 그럴싸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산책 삼아 캠핑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곳은 설악산에 있는 주전골 계곡의 하류 부분인데, 약수가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사시사철로 정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것 같다. 이곳에서 지낸 일 년의 경험 때문에 다시는 도심의 물놀이장이나 눈썰매장에 가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이글루를 완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아들들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다시 나를 '조업장'으로 끌고 왔다. 큰 아들이 아이디어를 하나 냈는데, 돌도끼로 얼음을 다듬으니 원하지 않는 모양으로 깨져서 손실이 너무 크다는 것. 나한테 모닥불 피울 때 쓰던 도끼와 망치를 빌려달래서, 얼음 벽돌을 채굴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채굴한 얼음 사이즈가 두배로 늘어났다. 벽돌이 커지니, 이글루 제작 속도가 급속히 올라가, 점심때쯤은 출입문 아치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결국 오후 5시쯤 돼서 완성. 마지막 지붕은 도저히 올릴 수 없다 하였는데, 아들이 또 어디서 큰 나무를 끌고 와서 대들보로 올렸다. 그리고 채굴 과정에서 아껴두었던 가장 크고 두꺼운 얼음판을 천장으로 올려서 마무리 시공을 하였다. 이쯤 되니 손은 덜덜 떨리고, 발은 얼음물에 젖어서 얼어붙고, 내가 이 고생을 왜 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고, 예쁜 동화로 시작한 이야기가, 극한직업 체험 같은 리얼 다큐로 바뀐 것 같았다.

아들의 완성 세리머니. 이틀 내내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 고생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너무 늦어, 기껏 완성한 이글루에서 정작 사진만 몇 장 찍고 서울로 돌아와야 해서 몹시 아쉬웠다. 다음에 갈 때까지 날씨가 꽁꽁 얼어붙어 부디 잘 버티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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