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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Oct 10. 2019

조직 붕괴

지난 두 달간 끌어온 조직 재편성이 이번 주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더니 오늘 드디어 신규 조직 구성안이 발표되었다. 우리 팀은 소문대로 공중분해되었고, 24명이 총 10개의 조직으로 찢어져 배치되었다. 코너에 몰렸던 팀장의 9회 말 역전 홈런은 없었다. '나도 다시 열심히 해서 재기할 것이고, 그때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팀 주간 회의에서 팀장의 맺음말이었다.


조직의 찢어짐은 예상보다 더 참담하였다. 차라리 Turn-key로 잘 나가는 B 전무의 담당으로 옮기라던 첫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그게 벌써 2달 전이다. 하지만 팀장이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의 주장대로 '더 나은' 팀원들의 진로 선택을 위해서인지,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고, 우리 담당인 A 전무를 설득하여 담당 내에서 이름과 미션을 바꾸는 새로운 팀을 창설하겠다고 하였다. 팀 구성원들은 다들 어리둥절하였다. 지금 같은 기술 레드오션 시장에서 남아있을 개발 아이템이 많지 않은데, 밑도 끝도 없이 팀 신설이라니.. 하지만 A 전무의 지시 사항을 무기로 팀장은 독자 팀을 추진해 나갔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달, 갑작스럽게 CEO가 교체되었고 일주일이 안되어 전사 임원 담당의 인원 정리가 진행되었다. B 전무는 승진하였고, 우리 담당 A 전무는 해임되었다. 해임 통보를 받은 그날 저녁, 짐을 싸고 10여 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나가시는 전무가 남긴 말은 '미안하다' 뿐이었다. 우리 24명은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예상대로 후속으로 진행되는 팀 조직개편에서 A 전무가 약속하였던 팀 신설안은 꺼내지도 못하였다. 우리를 지켜줄 보스가 없는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10개 팀은 사이트도 제각각이라, 지금 사무실에서 400km 떨어진 곳도 포함되어 있었다. 1년 단기 파견 조건도 있었지만, 기약 없는 영구 전출 케이스도 있었다. 팀장이 오늘 마지막까지 영구 전출을 막아보려 항명도 한 것 같지만, '회사가 어려운 상황인데, 개개인의 사정을 봐줄 수 없다'는 논리로 묵살되었다고 한다. 팀원들 대부분이 30대 초중반이고,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임신하거나, 출산한 사람들이 많았다. 당장 곡소리가 나왔다. 원치 않는 육아휴직 카드를 만지작 거리는 후배들도 많이 보였다. 나는 그나마 다행히도 '그렇게는' 멀지 않은 사업장 발령을 통보받았다. 오늘 집에 와서 큰 아이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였는데,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엉엉 울어버렸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아침마다 아빠랑 아침식사를 하교 등교를 하러 가는 길에 에너지를 얻고는 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너무도 속상했다.  회사가 어려우니 구성원 개개인이 정말 희생해야 하는 것일까. 이번 임원 인사 개편에서 부사장 급은 1명도 교체되지 않았다. 적자 1조를 예상하는 사업부에서도 부사장이나 전무급의 책임 진 인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회사 위기의 책임을 왜 구성원들은 떠않아야 할까. 끝없는 질문이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다.


회사를 다닌지도 10년이 넘었다. 입사할 때 느꼈던 가슴 벅찬 자부심을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올해 한 해 연구소에서 생활하면서 꾸준히 받아온 '조금 더 싸게 만들어 봐라'라는 일관된 요구 사항이 차츰차츰 연구자의 자존감을 갏아 먹은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가 이 회사를 다닌 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고 창피한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동종 업계보다 덜 팔았고, 덜 벌었고, 덜 개발하였으며, 덜 보상받는 이들이었다. 그런 나의 바닥 친 자존감이 지금 이 상황과 겹쳐지니 강한 음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였다. 회사가 지난주부터 생산직에는 희망퇴직을, 사무직에는 계열사 전배 카드를 꺼내 들었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고 신청서를 내버렸다. 더 이상 몸담기에는 내 바닥난 자존감의 향후 행보가 두려웠다.


회사 생활에서 전배 신청 카드는 배신자로 낙인찍기 좋은 카드이기에, 두루두루 나의 행보가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하니, 팀은 공중분해되었고, 멤버들은 전국 각지로 흩뿌려진 상태인데, 나는 그 와중에 배신자 딱지를 얹을 전배 신청까지 해 놓은 상태이다. 마음이 슬프다. 내가 사랑한 회사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내가 존경한 팀장이 도태되었고, 내가 사랑한 동료와 후배들이 나를 배신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40대의 사춘기일 거야라고 생각했던 이 방황의 상처 골이 생각보다 너무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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