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찍 올 수 있어? 환이 그럼 숙제도 다해놓고 씻는 것도 다해놓을 거니까 나랑 이따 밤에 체스 둘래?"
올해로 열 살이 되었고, 필요할 때는 따박따박 (혹은 바락바락) 말 잘하는 아이인데, 퇴근 전화할 때는 꼭 혀를 반쯤 감아올려 혀 짧은 소리를 시전 하고, 본인이 본인 이름을 부르는 3인칭 시점으로 말한다. 둘째는 절대 못 이긴다.
젊었던 시절 홍대 카페에 놓여있던 대리석 재질의 체스가 너무 멋있었고, 그 후로도 체스 스킬보다는 기물 욕심이 나서 몇몇 체스를 구매했었는데, 첫째가 초등학교를 가니 체스 방과 후 수업이 있지 않는가? 100% 아빠의 기호로 시작한 체스 수업. 큰 아이는 그렇게 4년을 배웠지만 지금은 집에서 체스를 잘 두지 않는다. 대한민국 중학생은 그럴 여유가 없지.
질투의 화신 막내가 어깨너머로 체스를 배운 건 작년 여름. 아빠랑 형이 '둘이서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그는, 까칠한 형에게 과자를 수없이 상납하면서 체스 기물 움직임을 배웠던 것 같다. 어느 날 기새 등등하게 "아빠, 나 이제 체스 둘 수 있어. 나랑 한판 하자"라고 한 날 어찌나 귀엽던지!
잘 둘리가 있나. 고사리 손으로 나이트 기물 갈 방향을 일일이 세어보는 모습이 귀여워 계속 같이 해주었는데, 요 녀석 눈썰미가 남다르다. 한번 알려준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해 내고, 몇 번 당한 트릭은 곧잘 자기가 써먹을 줄도 안다. 위기에 몰려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도 귀엽다. 보통, 초보자 어드벤테이지를 위해 퀸, 룩을 빼놓고 해 주는데, 이번 주부터는 계속 지고 있다. 처음에는 마지막 마무리를 잘 못해 스테일메이트로 비긴 경우가 많았는데 엄청 억울해하더니, 어제는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몰고 가더니 승리를 가져갔다.
"혹시.. 체스에 재능이 있나?"
아이는 재미로만 하는 체스에, 아빠는 또 욕심을 부린다. 주말에 동네 체스 학원 레벨테스트를 예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