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다소 멀리 있던 초등학교를 다녀서 새벽부터 깨워 셔틀버스를 태워 보냈었다. 그렇게 6년을 챙기고 나서, 올해부터는 집 앞에 있는 중학교를 보내게 되니, 이제 나는 아침에 혼자 일어나서 출근을 해도 되는 것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동안 매번 출근길에 맥도널드 드라이브 쓰루에 들러 맥모닝에 커피 한잔 먹으며 가는 호사도 부렸었다. 그런데 반대로 와이프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를 모두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니 부담이 많아졌다. 아침잠이 유독 많은 사람이라, 늘 잠이 부족해졌고, 아이들은 아침도 못 먹고 부랴부랴 등교를 해야 하니 서로가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회사에 자율 근무제 제도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지난 15년 동안 한 번도 신청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과 와이프를 챙겨보려고 신청을 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을 하겠다고 했다. 후배들이 다 출근해 있는 10시쯤 출근을 하며 눈길을 끄는 것도 싫었고, 노땅처럼 퇴근 시간 이후 혼자 남아 있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는 아이들과 와이프를 챙겨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가끔씩 오전 미팅이 있거나 퇴근 후 석식이 있을 때는 정시 출퇴근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율 근무 시간을 따랐고, 아침에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키고, 와이프도 지하철 정류장에 내려준 후 출근을 했다. 나만의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은 고스란히 반납했지만, 세 사람을 모두 챙긴 후 출근하는 출근길은 생각 외로 너무 풍족한 기분이었다. 아이들도 아빠가 집에서 아침 챙겨주는 게 좋은지, 기분 좋게 등교하는 날이 많았고, 와이프도 한결 수월해진 것 같다고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한 시간'의 자율 출근제로도 이렇게 행복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물론 이 사소한 한 시간의 자율 출근제도, 눈치를 보며 쓰기 힘든 게 대다수의 한국 직장인들의 현실이지만..
이왕 아침을 책임지는 것, 야무지게 챙기기 위해서 녹즙기를 하나 구매했다. 녹즙기라는 표현은 너무 예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정겨운 면도 있다. 어릴 때 어머니가 가끔은 녹즙기로 과일 주스를 내려주셨던 기억이 있다. 자주 해주시지는 않았고 가끔만 얻어먹을 수 있었던 추억. 그때의 그 향수를 기억하며, 나도 이제는 아이들에게 주스를 내려준다.
기본 베이스는 사과이다. 대한민국에서 사과는 사철 과일이라 어느 때도 구하기 쉬운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큼하고도 달달한 맛이 있어서 어떤 과일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사과 자체로만 즙을 내도 훌륭한 사과 주스가 되지만, 너무 달기도 하고, 쉽게 갈변이 되어서 보기가 좋지 않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사과 2개에 당근 1개를 넣는 사과 당근 주스가 가장 만들어 보기는 쉽다. 그리고 그 맛은, 상상외로 정말 맛있었다! 당근을 평소에 절대 먹지 않는 와이프도 그 자리에서 두 컵을 마시는 정도니까. 사과 당근이 지겨워지면 오렌지나 감귤을 넣어주면 또 다른 맛을 찾을 수 있다. 녹즙기 구매 후 첫 2주 동안 이 주스만 만들었었는데, 나중에는 사과랑 당근을 너무 많이 써서 그만두어야 할 정도였다.
당근이 내는 주홍빛 색도 예쁘지만, 케일을 넣어 만드는 그린 주스 또한 너무 예쁘다. 케일의 효능을 찾아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하나 가득 나오지만, 사실 나는 주스를 내리고 투명한 컵에 따라 놓았을 때의 색감이 너무 좋아서 많이 만들었다. 그냥 그 색만 보아도 '나 마시면 건강해질 거야'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물론 둘째는 단 맛이 적어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요즘에 가장 많이 만들고 있는 주스는 '오일만 주스'와 그의 변종이다. 오일만 주스는 파슬리와 레몬으로 만드는 주스인데 다이어트 주스로 TV에 소개된 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5일 마시고 8일을 쉬는 게 좋다고 해서 오일만 주스인데, 실제로 맛을 보면 거의 약이라고 생각해야지 마실 수 있는 정도이다. 파슬리도 그 향이 강한데, 거기에 레몬까지 더해지니.. 몸에 좋기는 할 것 같아서, 여기에 사과를 추가해서 갈아 내었더니, 어느 정도 단맛이 가미되어 마실만 했다. 큰 아이와 와이프는 다이어트가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오리지널을 마시고, 막내와 나는 스위트 버전을 마시고 있다.
주스를 내리면서 자연스레 같이 먹을 아침도 챙기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주스를 내리기 위해 이런저런 식자재를 구입하다 보니, 아침 식사도 덩달아 풍족해진다는 점. 계란 프라이만 부치던 것이 생 파슬리가 있으니 오믈렛을 만들게 되고, 사과가 싱싱하다 보니 햄이랑 치즈를 같이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게 되는 식이다. 요즘엔 냉동 크루아상 생지를 사서 아침에 녹여서 구워 내는데, 갓 구워낸 빵 맛이 일품이다. 아보카도도 일주일에 한 꾸러미씩은 사놓아서 숙성시키는데, 적당하게 익었다 싶으면 훈제 연어를 한팩 준비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내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
늘 찡그리고 피곤해하며 일어나던 아침이, '녹즙기' 덕분에 아주 분주해졌다. 씻기고 다듬고 짜내고 굽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가지만, 아깝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해서 가족들을 먹이고 출근하면 마음이 꽤나 든든하다. 퇴근 후에도, 이런저런 과일과 채소들을 장 보면서 냉장고에 채워 놓으면 마음도 약간은 풍족한 느낌이다. 요리를 하면서 머리를 짜내고, 손을 움직이고, 그리고 그 맛에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전에 없던 소소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