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온 힘을 다해 빛나본 적이 없었다.

02. 성냥

by 김민경


성냥


까칠한 마찰면 위에

둥근 머리를 맞대어 긁으면

기다렸다는 듯 불꽃이 터진다.


상자에 갇혀 부딪힘이 없었다면

비로소 네가 빛을 밝힐 기회가 있었을까.


그 찰나의 마찰이 불꽃의 전부를 밝히듯,

어떤 빛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너의 마찰이 닿기 전까지

나는 온 힘을 다 해 빛나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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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을 바라보면, 거친 마찰면에 제 몸을 긋는 순간 발생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귓가를 스친다. 우리는 마찰을 대개 소모적인 것으로 배웠다. 미용사로 살며 내가 마주한 마찰이 그러했다. 가위 날의 서늘한 마찰음은 타인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동시에 나의 손목을 갉아먹었고, 거울 너머로 쏟아지는 타인의 무거운 감정들은 내 마음의 표면을 거칠게 마모시켰다. 나에게 마찰은 늘 무언가 닳아 없어지는 통증의 예고였고, 나를 증명하기 위해 기를 써야 하는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하지만 성냥에게 마찰은 소모가 아니라 발현(發顯)이다. 태생적으로 불꽃을 품고 있으나, 그 뜨거운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비극적인 존재다. 어두운 상자 속에 갇혀 부딪힘이 없다면 그 어떤 생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타오를 가능성이 내면에 충만할지언정, 그것을 현실의 불꽃으로 피워낼 권한은 성냥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근 후 돌아온 방은 언제나 불 꺼진 수족관 같았다. 낮 동안 사람의 시선에 덴 자국들이 짓물러 흉터가 되었고, 나는 더 이상 세상이라는 거친 면에 부딪히고 싶지 않아 스스로 마음의 뚜껑을 닫았다. 상자 안은 비겁할 만큼 안전했으나, 그 일그러진 평온은 나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었다.


마찰할 대상을 찾지 못해 내면의 빛을 영영 목격하지 못하는 정체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성냥갑 속에 가두는 순간, 불꽃의 가능성은 눅눅한 침묵으로 사그라든다. 마찰이 없으면 흉터도 없지만, 그 어떤 빛도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적막한 어둠 속에서 나는 비로소 직면하고 있었다.


미용실의 거울 앞에서 보낸 시간은 곧 타인의 기색을 살피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손끝으로는 모질을 분석하고, 눈으로는 거울 속에 비친 상대의 표정 변화를 끊임없이 추적했다. 나에게 관계란 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가 원하는 최적의 답을 내놓아야 하는 피로한 계산식이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마주한 그는 나의 그런 유능한 방어 기제가 유일하게 작동하지 않는 예외의 공간이었다.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눈치를 보거나,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보여줄지 분석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세계. 그 앞에서의 나는 비로소 아무런 수식어 없는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 편안함 속에 머무는 동안, 나는 내가 세상이라는 마찰면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안전한 성냥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지극히 밀폐된 고요를 깨뜨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까이 있던 그의 개입이었다. 타인에게 늘 날카롭게 세웠던 나의 경계는 이상하게도 그 앞에서는 무용했다. 그는 끈질기게 내 주위를 맴돌며, 내가 나를 미숙한 존재로 낙인찍거나 상처 뒤로 숨으려 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반기를 들었다. 그의 말들은 다정한 위로라기보다, 내 삶의 밑바닥을 거칠게 긁어내는 당혹스러운 발화(發火)의 마찰에 가까웠다.


나는 내가 무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나의 무능을 증명하는 패배처럼 느껴졌던 그 마음은, 실상 나약함이 가공해 낸 ‘완벽주의적 오만’이었다. 이 오만은 나를 지탱하는 필연적인 마찰을 부정하게 했고, 나는 홀로 서 있는 척 비겁을 떨었다. 스스로를 긋지 못하는 나무토막이 홀로 빛을 내겠다고 우기는 일은, 고립을 자처하는 공허한 몸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세운 견고한 경계선을 넘어, 눅눅해진 나를 끄집어내 세상이라는 마찰면 위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 손길이 있었다. 성냥을 긋는 행위는 긋는 자의 손가락에도 뜨거운 화상을 남길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한다. 불꽃이 터지는 찰나의 열기를 가장 먼저 감내해야 하는 곳은 결국 성냥을 쥔 사람의 손끝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살결이 데일지도 모르는 그 무모한 마찰을 기꺼이 자처하며, 멈추지 않고 나를 문질렀다. 나를 긁어내며 발생하는 그 작은 소음과 온기가 나를 해치려는 공격이 아니라, 다시 뜨거워질 수 있다는 집요한 격려임을 깨달았을 때 나의 오만은 비로소 힘을 잃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나의 패배가 아니라, 나를 불꽃으로 피워내기 위해 기꺼이 상처 입기로 결심한 타인의 헌신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 뜨거운 마찰이 없었다면, 나는 영영 내 안의 빛을 목격하지 못한 채 사그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제 불꽃보다 먼저 그 거친 면을 본다. 화려한 빛보다 앞서 존재했던, 나를 긁어내기를 선택해 준 그 무모하고도 정직한 사랑을 본다. 어쩌면 평생을 바쳐 증명해야 할 것은 나의 눈부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한때 누군가가 기꺼이 나의 거친 면이 되어주었음을, 그 뜨거웠던 마찰 덕분에 내가 비로소 따뜻해졌음을 온전히 수용하는 일.


구원은 결국, 그 뜨거운 마찰을 기꺼이 받아들인 수용의 끝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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