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단풍
단풍
가늘게 흔들리던 잎은
계절의 태반을 초록빛으로 보냈다.
스쳐 가는 계절 끝에서
단 한 번, 자신의 빛을 붉게 드러냈다.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그 찬란한 붉은빛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모두가 같은 곳, 같은 때 물들지 않는다.
언젠가 붉어질 순간을 위해
누군가는 아직 초록빛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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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붉게 물든 산등성이에 머문다. 화려하게 제 존재를 드러낸 단풍을 보며 감탄하지만, 나는 그 붉은빛 아래 가려진 잎들의 기나긴 '초록의 시간'을 생각한다. 가늘게 흔들리던 잎은 계절의 태반을 초록으로 보냈다. 그 무성한 시간 동안 잎은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장마의 무게를 버티며 제 안의 색을 남몰래 갈무리해 왔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단풍이 드는 것을 계절의 끝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생의 단 한 번, 제 안의 가장 뜨거운 진심을 꺼내 놓는 절정의 순간이다. 찰나처럼 짧은 그 눈부심을 위해 잎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밀한 준비를 해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겠지만, 잎에게는 생을 건 단 하나의 문장을 세상에 새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주변의 속도보다 무서운 것이 내 안의 독촉이다. 내가 가진 가능성을 알기에,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있기에, 여전히 제자리인 초록빛의 나를 마주하는 밤은 시리고 고통스럽다. 나는 유난히 시리던 나의 한 계절을 복기한다.
미용실의 조명은 지나치게 밝았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나는 매일 수십 번씩 타인의 절정을 빚어냈다. 누군가의 가장 화사한 날을 위해 머리칼을 만지고, 그들의 웃음을 거울 너머로 확인하는 동안 정작 나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다. 손끝에 닿는 타인의 머리카락은 따뜻했지만, 가위를 쥐고 있는 나의 손마디는 늘 서늘했다.
머리칼을 잘라내며 어루만지던 손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남들이 얼마나 붉게 타오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완벽하게 물들지 못한 오늘의 나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가위는 타인의 머리칼이 아니라 나의 자존감을 시도 때도 없이 잘라내고 있었다.
결국 사단이 났다. 갑작스레 공황이 찾아와 숨이 조여오던 그 순간, 미용실의 그 밝은 조명들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화살처럼 느껴졌다. 숨을 쉴 수 없는데도 나를 지배한 건 무너지는 몸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이러면 내일 예약은 어떻게 하지? 내일도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라는 서늘한 독백이었다.
나를 돌보는 일보다 내가 완벽하게 해내야 할 일들이 멈추는 것을 더 공포스럽게 여겼던, 그 지독한 완벽주의가 나의 초록을 시들게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태워 물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재가 되어 으스러지고 있었음을.
이제는 나를 몰아세우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잎들을 본다. 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단풍은 옆 나무와 경쟁하며 물들지 않는다. 오직 제 안의 온도가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스스로의 생을 다해 어제의 초록을 지워내는 정직한 자기 증명이다. 옆집 나무가 벌써 붉게 탔다고 해서 조급해진 나무가 엽록소를 억지로 뱉어내는 일 따위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
채색의 속도가 더딘것은 결코 성장의 부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짙은 붉음을 위해 더 오랜 광합성이 필요한 나무도 있는 법이다. 남들이 붉게 타오를 때 여전히 초록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뒤처진 것이 아니라 아직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큼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멈춰 선 나의 공백은 정지가 아니었다. 가장 나다운 붉은빛을 내기 위해 내면의 온도를 1도씩 높여가던 치열한 공정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느낀다. 가위를 내려놓고 낯선 고요 속으로 들어온 지금의 시간이야말로, 내 생애 가장 치열한 광합성의 시기인 것이다.
그 기다림은 헛된 정체가 아니라,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나 자신과 치르는 가장 정직한 전쟁이다. 나는 이제 남들의 붉은빛에 눈이 멀어 나의 묵묵한 초록을 비하하지 않기로 했다. 타인과 속도를 맞추려 억지로 엽록소를 뱉어내지 않아도 괜찮다.
언젠가 나만의 계절이 당도하는 순간, 어제는 상상하지 못했던 가장 깊고 단단한 붉은빛이 비로소 나의 이마 위에 내려앉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