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살 위로 내려앉은 다음 계절

03. 헌 옷

by 김민경


헌 옷


낡았으니 버려야 할 옷인데

너무 오래 입고 살아

이제는 벗어내는 일이 더 두려워졌다.


몸에 익은 옷은

끝자락부터 해져 있었고,


나는 그 익숙함에 기댄 채

한 철을 더 살아냈다.


이제는 너라는 허물을 벗어낼 때.

너를 껴입고 있던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따뜻하지 않았다.



-




가위를 내려놓으면 모든 소음이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일터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요가 아니라 막막한 공백이었다. 새로운 문장을 적어 내려가야 한다는 결심과는 달리, 나는 시작의 문턱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렸다. 낯선 경험을 향해 손을 뻗는 일이 그토록 겁이 날 줄은 몰랐다.


그 막막함의 틈을 타고 스며든 것은 너무도 익숙한 무기력이었다. 미용사라는 직업의 옷을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에는 여전히 축축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감겨 있었다. 나는 따로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그저 매일 입던 평상복이 나의 전투복이었다. 하지만 그 일상의 옷감 사이사이에는 타인의 머리카락 파편들이 가시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하루 종일 타인의 머리칼을 털어내도, 가느다란 파편들은 기어코 옷감을 뚫고 들어와 내 살결을 찔러댔다. 온몸에 미세한 파편이 박힌 것처럼 하루 종일 피부가 따끔거렸다. 일을 마친 뒤에도 운동화 발등 위에 겹겹이 쌓인 머리카락들은 도무지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염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했던 타인의 삶과 감정들이 내 몸에 남긴 지독한 흔적이었다. 너무 오래 그 가시 돋친 옷을 입고 있었기에, 나는 통증조차 살점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버렸다.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가장 비겁하고도 아픈 핑계였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나는 이 익숙한 고통 속으로 몸을 숨겼다. "준비가 되지 않았어"라며 낡은 소매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비참했지만 평온했다. 그것은 어느새 내 몸의 굴곡을 따라 늘어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도 남루한 '헌 옷'이 되어 있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나에게 이 옷이 ‘무력한 안식’이었듯, 세상에는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헌 옷을 껴입은 채 오늘을 버티는 이들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관계를 억지로 껴입은 채 숨을 헐떡이고, 또 누군가는 '냉소'라는 차가운 코트를 단추까지 채워 잠근 채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안전을 담보로 제공받은 그 헌 옷이, 실은 안에서부터 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옷이 사라진 뒤에 마주할 차가운 시선들이 두려워 우리는 자꾸만 해진 옷깃을 여민다.


이 옷들의 공통점은 지독하게 '익숙하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 입어서 이제는 옷인지 내 살결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다. 옷을 벗고 난 뒤 마주할 나의 맨몸, 아무런 수식어 없이 세상 앞에 선 '초라한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우리에겐 부족하다. 거울 앞에 서서 가시 돋친 외투를 걸친 나를 응시한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짓이겨졌지만 나는 그 통증에 너무 오래 길들여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단추가 발등 위로 툭 떨어졌다. 내가 푼 것이 아니라, 옷이 제풀에 삭아버린 것이었다. 허망할 정도로 쉽게 벗겨져 나간 검은 허물을 보며, 나는 당혹감보다 먼저 지독한 슬픔을 느꼈다.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었는데,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이 무게를 벗어던지지 못했을까.


이 옷이 스스로 삭아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도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던 무기력 속에서도, 내가 차마 외면하지 못한 '작은 온기' 때문이었다. 방안의 빨래 더미는 산을 이루고 먼지가 발목을 잡던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도, 나는 매일같이 현관문을 열어야만 했다. 나 하나는 시들어도 상관없었으나, 나만 바라보는 작은 생명의 정직한 눈망울까지 어둠 속에 가둬둘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처절한 의무였다. 목줄을 쥐고 밖으로 나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가시 돋친 헌 옷을 입은 채로라도 세상의 바람을 맞아야 했다. 발걸음을 따라 억지로 내딛던 그 보잘것없는 움직임들이 사실은 견고한 옷감을 안에서부터 조금씩 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남들에겐 당연한 일상이 내게는 생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야 하는 마찰이었음을, 그 작고 정직한 발자국들이 쌓여 비로소 나를 옥죄던 헌 옷의 실밥을 터뜨린 것이다.


허물이 벗겨진 자리에 남은 답은 서글프게도 명확했다. 나는 정말로 아팠던 것이다. 늘 이 정도는 아니라고, 엄살일지도 모른다고 부정하던 시간들이 사실은 처절한 붕괴였음을 이제야 수긍한다. 가시 박힌 옷을 벗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아픔을 믿어줄 수 있었다.


옷을 벗어던진 자리, 텅 빈 여백을 채운 것은 매서운 공포가 아니라 겨울 아침의 찬 공기 같은 맑은 숨이었다. 들숨이 폐부 깊숙이 박힐 때마다 시린 감각이 온몸을 훑었으나, 그 시림이야말로 내가 더 이상 가시 돋친 옷 속에 숨어 있지 않다는 선명한 실감이었다.


여전히 시작은 막막하고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으나, 적어도 나는 이제 맨몸으로 그 앞에 서 있다. 익숙한 그늘에서 걸어 나오는 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새 옷을 갈망하기 전에 나를 옥죄던 헌 옷을 담담히 내려놓는 것. 삶의 문장은 어쩌면 무언가를 껴입는 화려함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덜어낸 맨살의 정직함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루한 외투를 벗어던진 자리, 비로소 나의 맨살 위로 다음 계절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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