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러지는 무연(無緣)의 조각들

04. 분리

by 김민경

분리


살에서 멀어질수록

끝내 하얗게 질려버린 경계.


산 것이 죽은 것을 밀어내는

가장 단단한 증거를 포착해

날 선 금속으로 하나씩 거두어낸다.


툭, 툭,

바닥으로 낙하하는 것들은

이제는 밟히면 바스러지는 무연의 조각들.


허물을 벗었다고 하기엔 너무 시리고

상처를 도려냈다고 하기엔 무덤덤한

얇아진 손끝을 만져본다.


누군가를 할퀴던 무기를 덜어내고서야

비로소 나는 손을 내밀 수 있는

온기가 되었다.




-





미용사로 일하던 시절, 나의 아침은 늘 손톱을 점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타인의 살결에 가장 가까이 닿아야 하는 직업. 길게 자라나 날카로워진 손톱은 자칫하면 손님의 목덜미나 귓바퀴를 할퀴는 흉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바짝 손톱을 깎아냈다. 살에서 멀어질수록 끝내 하얗게 질려버린 그 경계를 날 선 금속으로 하나씩 거두어낼 때마다, 손끝은 뭉툭하고 순해졌다.


그것은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직업적 약속이었으나, 한편으론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의식이기도 했다. 뼈의 일부가 살을 뚫고 나와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도록 스스로 무기를 덜어내는 일. 그렇게 뭉툭해진 손으로 샴푸대 앞에 서서 타인의 두피를 만질 때면 묘한 촉감이 전해져 왔다. 짧은 머리카락의 까칠함과 두피의 부드러움이 동시에 지문에 닿는 그 생경한 감각.


하지만 그 감각보다 더 선명하게 각인된 것은 정작 나의 발끝에 있었다. 샴푸대 아래로 스며 나온 물방울들이 조금씩 나의 운동화를 적셨다. 타인의 머리를 정성껏 씻겨내는 동안, 나의 발가락은 그 축축한 물기 속에서 하얗게 불어 터져 갔다. 손끝으로는 타인의 온기를 만지면서도, 정작 나의 발치에 고인 차가운 습기는 외면해야 했던 기묘한 분열의 시간들. 나는 그렇게 나를 젖게 두면서 타인을 씻겨내는 일에 몰두했다.


어느 무력한 오후였다.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다가, 제때 깎지 못해 길게 자라난 손톱 하나가 옷감에 걸려 허무하게 뒤집어지는 것을 보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죽은 세포인 줄만 알았던 손톱은 부러지는 순간 기어이 생살을 물고 늘어져 붉은 피를 내보이고야 말았다. 고작 이 작은 조각 하나 덜어내지 못한 대가가 이토록 쓰라린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응어리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낯선 이의 무례함 앞에서도 기어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비굴한 상냥함이었고,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 가위질 한 번에 누군가의 인상을 좌우하고, 한 번 잘려 나간 머리칼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매 순간 나를 질식하게 했다. 매출에 대한 압박보다 무서운 건, 나의 실수가 타인의 하루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규격에 나를 맞추려 할수록, 나의 책임감은 기형적으로 자라난 손톱처럼 내 안을 할퀴고 있었다.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자의식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스스로를 돌보는 감각마저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마음에서 뻗어 나왔으나 이미 생명을 다한 세포들. 더 이상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이 죽은 파편들을, 나의 형태를 유지해 줄 유일한 증거라도 되는 양 미련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비워내지 못한 무게는 결국 내 일상의 틈새를 찢고 들어와, 속살처럼 연약한 자존감을 헤집어 놓았다. 분리되어야 할 것들을 품고 산 대가는 이토록 선명한 자상이었다.


손톱은 산 것이 죽은 것을 밖으로 밀어내며 생기는 '분리'의 결정체다. 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무겁게 하거나 날카롭게 만드는 것들은 제때 밀려나 바닥으로 추락해야 한다는 사실을. 썩지 않기 위해 덜어내야 하고, 살기 위해 버려야 한다는 그 자명한 생존의 원리를 내 몸은 매일 아침 하얀 손톱의 형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토록 무력한 조각에 휘둘려 피를 흘렸다는 사실이 허탈해졌다. 그것들 역시 이 손톱 조각처럼 한때의 나였을 뿐, 지금의 나를 지켜주지는 못하는 죽은 부스러기라는 것을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툭, 툭. 바닥으로 낙하하는 조각들은 이제 밟히면 바스러지는 무연의 존재들이다.


나는 이제 무거운 가위를 내려놓았던 그 손으로, 내 마음의 해묵은 경계를 다듬는다. 한때는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날카로움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나를 가두고 타인을 밀어내는 죽은 조각들일뿐이다. 그것들을 잘라낼 때 느껴지는 미세한 시림은 통증이 아니라 해방의 감각에 가깝다.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은, 내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것들을 골라내어 기꺼이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는 용기면 충분하다. 부러지고 찢겨 비명을 지르기 전에, 스스로 덜어낼 줄 아는 주체적인 이별. 그 시린 분리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누군가를 할퀴지 않고도, 뭉툭해진 손으로 나를 온전히 보듬는 법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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