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05. 파도

by 김민경

파도


커다란 덩치의 너는 늘 나를 덮친다.

하루에도 수천 번 나를 훑고 지나가는

외길의 방향들.


피하려 할수록 어지러웠고

거스를수록 깊이 파였다.


쓸리고 패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모양을 닮아갔다.


너를 막지 못해 스며든 비릿한 물결은

내 안의 지층이 되었다.


흩어지는 줄만 알았던 나는

스며든 너를 품은 채 더 단단해졌다.




-




바다는 늘 평온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흔들림조차 대개는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 전조다. 바람이 불고, 기압이 요동치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물을 밀어낸 결과물이다.


파도는 물이 앞으로 나아가는 현상이 아니다. 물 입자 하나하나는 그저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 실제로 밀려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다.


나에게 우울이 찾아오는 방식도 이와 같았다. 파도가 덮치기 전, 나의 내면은 기압이 요동치듯 미세한 신호들을 먼저 보내왔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타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거나, 길을 걷다 이유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때로는 억눌린 슬픔이 방향을 틀어 날 선 화로 분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격정의 파동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갯벌처럼 눅눅하고 무거운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내 안의 에너지가 한계치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피할 수 없는 되풀이였다.


지난 시간,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나는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흔들렸다. 피하려 하면 균형을 잃었고, 거스르려 할수록 마음의 밑바닥은 거세게 뒤섞였다. 그때의 나는 파도를 기어이 이겨내야 할 적대적인 대상으로만 여겼다. 악착같이 견디지 않으면 침식될 것만 같은 위협, 언젠가는 멈추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고통스러운 움직임. 하지만 파도는 멈추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쓰러뜨리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저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식이 그 방향이었을 뿐이다.


그 치열한 방어는 나를 지켜주기는커녕, 파도보다 먼저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멈춰 세운 것은 그해 겨울, 가족들의 강권에 못 이겨 떠난 여행지에서 마주한 풍경이었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마주한 겨울바다의 뻥 뚫린 광경에 시원한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고 바다의 기세를 즐겼지만, 내게 그 바다는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우울이 깊어지면 찾아오는 극단적인 생각들이 파도 소리에 섞여 귓가를 때렸고, 나는 그 푸른 바다 앞에서 숨이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모두가 자유를 노래할 때 나 홀로 고립된 섬이 되어, 파도가 나를 끌고 가기만을 기다리는 공포 섞인 권태 속에 서 있었다.


그 사나운 겨울바다 앞에서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집채만 한 파도가 아니라 그 앞을 서성이는 갈매기 떼였다. 거대한 물벽이 발끝까지 밀려와 사납게 부서지는데도, 그 작은 새는 날개를 펴서 도망가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파도가 닿기 직전까지 오직 모래알 속의 먹이를 찾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파도는 파도의 일을 하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할 뿐이라는 듯한 그 무심하지만 의연한 태도.


나는 그들의 무구한 생존 본능에서 배웠다. 내가 그동안 파도에 잡아먹혔던 이유는 파도가 강해서가 아니라, 파도만 바라보느라 내 몫의 삶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갈매기에게 파도는 피해야 할 재난이 아니라, 그저 젖은 발을 말리며 지나가야 할 일상의 배경일 뿐이었다.


죽음의 유혹마저도 그저 지나가는 거친 물살 중 하나로 여길 수 있는 용기, 그것은 파도를 막아서는 힘이 아니라 파도를 배경으로 두는 무심함에서 나왔다.


덮쳐오는 우울을 막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파도가 발끝을 적시더라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가 먹어야 할 밥을 먹을 것이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저항의 방식으로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이었다.


파도는 같은 모습으로 고착되지 않는다. 부서지는 순간 그것은 열이 되거나, 또 다른 파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던 공포 또한 한 형태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파도 앞에서 온몸의 힘을 빼는 법을 배웠다. 저항을 멈추고 몸을 맡기자, 나를 가라앉히던 물결이 나를 띄우는 부력이 되었다.


파도를 막지 못해 내 안으로 스며든 결들은 결국 내면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약점처럼 느껴졌던 그 축축한 흔적들이, 시간이 흐르자 어떤 풍랑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지층이 되었다. 흩어져 소멸하는 줄만 알았던 나는 사실 그 고통의 퇴적물들로 인해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삶의 파동을 배경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을 때, 나를 무너뜨리던 무게는 비로소 나를 지탱하는 뼈대가 되었다. 파도는 여전히 온다. 늘 같은 방향으로, 변함없는 리듬으로.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반복이 나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내일의 내가 걸어야 할 모래사장을 묵묵히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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